등록 : 2009.06.22 21:02
수정 : 2009.06.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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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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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중동은 서구로부터 쉼 없이 시달림을 받아온 지역이다. 그 시작을, 대륙을 평정한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의 칼에 무너진 이후로 잡는 학자도 있다. 늘 덩치 큰 문화권의 중간에 끼여 이리저리 치인 것이 그들의 역사다. 그럴수록 때묻지 않은 이슬람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내적 열망은 커져 갔다.
이슬람 세상을 만들기 위한 법 체계를 샤리아라고 한다. 샤리아는 정치·사회·문화·성 등 개인의 삶 전체를 아우른다. 이 종교적 율법의 바탕이 코란이고, 코란은 그들의 전부인 알라의 말이다. 율법이 지배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늘 그들에게 신기루였다. 이란도 그랬다. 1차 대전 이후 영국의 작전으로 왕(샤)이 된 무하마드 레자는 민심에 귀를 닫았다. 레자 샤는 석유를 팔아 금고를 채웠고 국민은 배를 곯았다. 율법은 무시됐고, 성지 순례는 방해를 받았다. 신심 깊은 국민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뎌야 했다.
서구 제국들에 이란은 끝까지 그저 ‘석유탱크’였다. 2차 대전 때 연합국은 이란을 침공해 독일을 도운 레자 샤를 단숨에 폐위시켰고 아들인 팔레비가 왕위에 올랐다. 팔레비는 석유 국유화를 추구하는 정부와 대립하다가 1953년 망명했으나 영국 등은 군사 쿠데타를 도와 그를 복귀시켰다. 그 뒤 20여년의 팔레비 독재는 1979년 호메이니가 이슬람 최고지도자가 되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이란은 이후 미국의 공적이 됐다. 이란인들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시작이었지만, 이것도 팔레비를 미국이 받아준 것이 원인이었다.
그 이란에서 요즘 대선 후유증으로 유혈 사태가 확산되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은 강경진압을 비난하고 나섰다. 보편적 가치로 포장됐지만, 뒤에서는 여전히 중동 지도를 놓고 주판알 튀기기에 바쁠 것이다. ‘서구의 변방’ 이란의 참상이 아리다.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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