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6.24 18:06
수정 : 2009.06.2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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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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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아랍에선 커피가 ‘이슬람의 포도주’로 대접받았지만, 커피하우스는 여러 권력자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1511년 메카에선 커피하우스가 금지돼, 주인은 물론 손님까지 태형을 받았다. 당시 메카의 권력자인 카이르 베그는 커피하우스가 자유로운 발언을 부추긴다고 봤다. 비슷한 이유로 1534년 카이로에선 커피하우스가 철거됐고, 1554년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칙령으로 금지됐다.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샤 아바스는 커피하우스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대화를 억누르기 위해 율법학자들을 커피하우스에 상주시켜 정치 말고 시·역사·종교 이야기만 하도록 했다.
영국에서도 커피하우스는 한때 박해의 대상이었다. 찰스 2세는 1675년 커피하우스가 ‘무질서의 온상’이라며 폐쇄 포고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 탓에 포고령은 시행도 되기 전에 폐기됐다. 1700년께 런던은 인구 60만명에 커피하우스가 무려 3000개였고, 세계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도시였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푼돈 대학’(Penny University)으로도 불렸다. 1페니만 내고 들어서면 커피는 물론,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연설을 듣고 토론에 끼어들 수 있었고, 관보나 책자도 볼 수 있었다. 파발꾼들이 여러 커피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최신 소식을 큰 소리로 알리는 풍경도 전해진다. 실제, 일간신문의 효시라는 <스펙테이터>는 1711년 커피하우스 단골손님들을 대상으로 해 창간됐다. 커피하우스는 정보와 뉴스의 중심지, 곧 광장 구실을 했다.
따지자면, 광장은 커피하우스보다 더 오래된 사교와 담론의 공간이다. 그런 광장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의 조례를 서울시가 만들었다고 한다. 공공질서 확보를 내세우고 정치집회 금지에 초점을 맞춘 점에선 몇 백 년 전 커피하우스 금지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나중에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려고 이러나.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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