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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06 21:52 수정 : 2009.07.06 21:52

함석진 기자

할 말이 많아도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있다. 외길에서 불량배를 만났을 때처럼, 우리는 입이 주먹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알고 있다. 그건 몸이 아는 두려움이다.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한명회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두 딸을 예종과 성종의 왕후로 만들고, 자신은 영의정까지 올랐다. 한명회는 한강가에 자신의 호를 딴 정자 압구정과 별장을 지었다. 별장 현판에는 시를 적었다. ‘청춘엔 사직을 붙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백성들에겐 눈꼴신 일이었지만, 목숨을 부지하려면 침묵할 도리밖에 없었다. 썩은 세상을 조롱하며 강호를 떠돌던 매월당 김시습의 눈에 어느 날 이 시구가 들어왔다. 그는 시구의 부(扶)를 危(위)로, 와(臥)를 오(汚)로 고쳐 써서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는 뜻으로 바꿔버렸다. 여론을 의식한 한명회는 김시습을 어찌하지 못하고 속만 끓이다가 결국 현판을 떼어버렸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대통령이나 정부를 시원하게 욕하는 글이 오르면 “용기에 박수”, “괜찮으실지 걱정됩니다” 같은 댓글이 붙는다. 새로운 글쓰기 양식도 등장했다. 우선 인용부호를 넣어 마음대로 비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적는다. “대통령을 모독하는 이런 나쁜 글을 인터넷에 올리면 안 됩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시국선언문도 불온문서가 되고, 명단은 언제 체제전복 세력 리스트로 둔갑할지 모른다. 경찰의 전화를 받고서 아이들 얼굴부터 떠올랐다는 한 시민의 인터넷 글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대통령이 떠들썩하게 ‘재산 기부’ 발표를 한 날, 경찰은 지난해 5월 유모차를 가지고 촛불집회에 참가한 주부 44명에게 출석요구서를 돌렸다. 도로교통법상 도로를 무단 보행한 혐의였다.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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