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29 18:33
수정 : 2009.07.2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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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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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입학사정관 제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00년 전쯤이다. 지금은 개천의 잠룡을 찾아내는 제도인 양 알려지고 있지만 애초에는 급증하는 유대인 학생 수를 줄이려는 궁여지책에서 출발했다고 <선택된 자>(The Chosen)는 말한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의 입학사정관을 지낸 제롬 카라벨은 하버드·예일·프린스턴 등 미국 명문대학의 입학사정관 제도의 역사를 살펴 이 책을 썼다.
19세기 말까지 이들 대학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예를 들어 1890년대 이들 세 대학엔 보스턴 상류층의 74%와 뉴욕 상류층의 65%가 입학했다. 이런 경향을 문제로 인식했던 로런스 로웰 하버드대 총장은 일반 공립학교 출신 남학생들을 뽑기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입학시험에서 제외했고, 곧 다른 대학들도 이 조처를 뒤따랐다. 그러나 이 조처는 유대인 입학생 급증이라는 예상 밖의 결과를 낳았다. 컬럼비아대는 유대인 비중이 40%까지 늘었고 하버드대도 20%대에 이르렀다.
즉각 움직임에 나선 것은 컬럼비아대였다. 1910년 이 대학은 성격·지도력 따위의 비교과 기준을 입학사정에 도입했다. 이 영역에 대한 평가는 입학사정관이 담당했다. 유대인 학생들은 학문적으로는 유능했지만, 이들 대학이 추구했던 ‘신사’의 범주에는 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교과 영역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버드·예일·프린스턴도 곧 이 제도를 수용하고 주관적 판단을 통해 ‘바람직하지 않은’ 학생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이렇듯 원하지 않는 학생들을 배제하는 장치였던 입학사정관 제도가 지금의 모습으로 변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대학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지적으로 우월한 학생들이 필요해진데다,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동등한 기회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갓 출발한 우리의 입학사정관 제도가 되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권태선 논설위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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