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31 18:23
수정 : 2009.08.31 18:23
|
여현호 논설위원
|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1976~78년 재임)는 1952년부터 중의원 의원과 대장상, 외상 등 화려한 정치 경력을 쌓은, 1970년대 자민당의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그가 총리를 지내던 때,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려다 경위로부터 제지를 받았다. 의원 배지가 없으니 규정에 따라 입장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옆에 있던 모리 요시로 의원(2000~01년 총리)한테서 배지를 빌려 단 뒤에야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본 중의원과 참의원에선 양복 상의와 의원 배지를 갖추지 않으면 예외 없이 회의장에 못 들어간다. 1890년 제국의회에서 의원 배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1903년부터 ‘경비상의 필요’로 배지 달기가 의무화됐다. 2006년 자민당에서 의원 배지 폐지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대로 유지된다.
한국 국회와 지방의회의 배지는 일본을 거의 그대로 본뜬 것이다. 모양부터 닮았다. 일본 중의원 의원 배지는 지름 20㎜의 금속 받침 위에 자주색 도판을 올리고 그 위에 나라꽃인 국화꽃 문양을 새겼다. 한국 국회의원 배지도 지름 16㎜의 자주색 도판에, 역시 나라꽃인 무궁화 문양을 얹고 그 안에 한자로 ‘나라 국(國)’을 새겼다. 두 나라 모두 당선되면 도금한 배지를 지급하고, 분실하면 돈을 내어 구입하도록 한다. 일본만큼 엄격하진 않지만 한국에서도 배지를 달아야 국회 출입이 쉬워진다. 무엇보다 의원들이 배지를 달도록 한 나라가 세계적으로 한국·일본·대만뿐이다.
국회 사무처가 의원 배지의 디자인을 바꾸기로 했다. 이번이 10번째다. ‘국(國)’ 자가 의혹을 뜻하는 ‘혹(或)’ 자로 오해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디자인을 바꾼 게 처음은 아니다. 괜한 일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이번 기회에 아예 배지를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