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9.06 18:15
수정 : 2009.09.0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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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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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총리가 담당 관청의 관리가 써준 문구를 잘못 읽는다는 게 웬말인가?’ 일본에서 총리가 국회에서 답변을 잘못 읽자 간부급 관료가 화를 벌컥 내며 내던졌다는 이 말은 일본에서 관료와 정치인의 힘의 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얘기되곤 한다. 정보를 집적한 채 법 집행을 담당하는 관료들에게 정치인들이 비전이나 정책 수립을 의존하다 보니, 관료들 눈에는 그가 아무리 국정을 총괄하는 총리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써준 답안을 낭독하는 기계 정도로 인식될 뿐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일본에선 관료란 국민들에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나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영어권에서 공무원을 의미하는 ‘시빌 서비스’(civil service)가 불편부당하고 이기심 없는 전문가를 의미하는 반면 관료제를 의미하는 뷰로크러시(bureaucracy)는 공공행정기관의 경직성이나 과도한 힘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관료와 기업에 의존해온 자민당을 물리치고 반세기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룩한 일본 민주당은 이런 관료제도의 개혁을 주요 정책목표로 제시했다. 국가전략국과 행정쇄신위원회라는 투톱 체제를 통해 관료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정치 주도’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탈관료정치의 길은 험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메이지 정부 이래 140년간 일본을 지배해올 정도로 관료제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물론 태평양전쟁 후 미군정기처럼 관료제를 개혁할 기회는 없지 않았으나 군정은 점령통치의 비용 절감이란 차원에서 이들을 그대로 활용했다. 남한의 미군정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를 활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후 일본 역사는 관료들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니 관료제 개혁에 민주당 정권의 성패가 걸려 있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권태선 논설위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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