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9.07 18:19
수정 : 2009.09.0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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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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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과 주유가 계절풍을 활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 적벽대전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화공(火攻)의 대표적 예라면, 관우가 저수지를 터뜨려 강가의 낮은 지대에 주둔해 있던 조조의 칠지대군을 쳐부순 번성 전투는 대표적인 수공(水攻) 작전이다. 서기 612년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무찌른 살수대첩도 수공의 성공 사례다.
하지만 옛 병법에서 수공은 화공에 비해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손자병법을 봐도 화공은 종류와 방법, 조건 등을 상세히 설명해 놓은 데 비해 수공에 대해서는 ‘화공편’의 말미에 짧게 언급하는 데 그쳤다. ‘화공을 감행할 때는 총명한 지혜가 뒷받침돼야 하고, 물로 공격할 때는 강한 병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수공은 적을 차단할 수는 있지만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453년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성을 공략한 작전을 보면 그 말이 실감난다. 오스만 튀르크 군은 운하를 파서 보스포루스 해협의 바닷물길을 성안으로 돌리는 수공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최종 마무리는 그 물길을 따라 소형 함선으로 성안에 들어가 불을 놓고 화약을 터뜨림으로써 끝났다. 우리가 수공이라는 말에 익숙해진 것은 역사책 덕택이 아니라 1986년 금강산댐 소동 때문이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폭파할 경우 서울 여의도 63빌딩까지 잠긴다는 당시 전두환 정부의 ‘가상실험’ 결과 발표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 소동은 1993년 국정감사를 통해 ‘쇼’로 드러났다.
북한의 예고 없는 댐 방류로 임진강 야영객들이 사망·실종하는 사고가 난 뒤 수공 이야기가 또 나오고 있다. 북한이 사전 통보를 하지 않고 물을 방류한 것은 어떤 이유로든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성급하게 수공까지 들먹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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