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27 18:32
수정 : 2009.10.2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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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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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일제의 조선 식민화 정책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저격해 살해한 지 100년이 됐다. 거사 일이 1909년 10월26일이었으니, 그제가 꼭 100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다음해 3월26일, 33살의 팔팔한 나이에 처형됐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사상보다 행위에 초점이 맞춰졌다. ‘민족의 공적’을 통쾌하게 징벌했다는 점에서, 항일운동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행위에 치우쳐 이뤄졌던 데는 그의 사상을 평가할 만한 자료의 부재 탓도 컸다. 78년, 79년 잇달아 그가 옥중에서 집필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이 발굴된 뒤에야, 그에 대한 평가의 중심은 사상 쪽으로 이동했다. 자서전은 일본의 한 고미술상이 조선총독부 소속 경찰 가족이 가지고 있던 것을 사, 78년 한국 정부에 기증했다. <동양평화론>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잠자고 있던 것을 안중근 연구가인 이치카와 마사아키 아오모리대 교수가 찾아내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성 유고이다. 안중근이 재판부에 완성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 달라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따른 것이다. 그가 쓰기로 구상한 서, 전감, 현상, 복선, 문답 가운데 전감도 채 끝내지 못했다. 한문으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해 봐야, 에이4(A4) 용지로 7~8장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재판기록과 신문조서 등에 나타난 그의 생각에 비춰 보면, ‘원고가 완전히 탈고될 때까지 처형을 면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짙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한·중·일 삼국이 동등하게 협력하자는 그의 생각이 한층 구체화한 형태로 제시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후세에게 완성의 기회를 주기 위해 미완성을 택했는지 모른다.
오태규 논설위원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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