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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17 18:16 수정 : 2010.01.17 18:16

정남기 논설위원

세계의 부를 한손에 쥐고 있던 영국의 금본위제가 깨진 것은 1797년 프랑스와의 전쟁 때였다. 프랑스군이 상륙했다는 소문에 중앙은행 구실을 하던 잉글랜드은행에서 대규모 인출 사태가 일어났다. 900만파운드였던 금 보유량이 순식간에 100만파운드까지 줄었다. 영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통화량 증가를 가져왔다. 물가가 급등하고 파운드화의 위상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금본위제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1815년부터 6년 동안 유통중인 지폐의 양을 절반으로 줄여 물가를 50%나 낮췄다. 많은 실업자가 발생했지만 이것이 회생의 발판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더 처참했다. 바닥난 정부 재정과 늘어난 통화량 때문에 상상도 못할 인플레이션이 몰아쳤다. 전쟁 전 1달러당 4.2마르크였던 화폐 가치는 1920년 초 65마르크, 1922년 7600마르크로 폭락했고, 1923년 8월엔 62만마르크, 1923년 11월엔 11조마르크까지 추락했다.

독일은 아예 새 화폐를 내놨다. 금이 아니라 토지에 기반을 둔 ‘렌텐마르크’였다. 객관적인 가치를 담보할 수 없었지만 통화량을 엄격하게 관리한 덕분에 화폐 가치 하락이 멈췄다. 1923년 11월 나온 지 한달 만에 물가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인플레이션으로 국채나 예금에 돈을 넣었던 중산층은 완전히 몰락했다. 물가를 잡은 뒤에는 경기후퇴로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그 수는 한때 450만명에 육박했다.

중국 인민은행이 지난주 시중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을 인상함으로써 풀린 돈을 회수하는 출구전략에 들어갔다. 다른 나라들도 조만간 출구전략 채택이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그에 따른 경기후퇴와 실업의 고통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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