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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20 18:29 수정 : 2010.01.20 19:20

함석진 기자

가끔 말이 싫을 때가 있다. 말이 세상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스스로 단절을 찾는 셈이다. 주변의 말들은 늘 조급하고 아슬아슬하다. 가파른 말은, 생존과 탈락의 경계에서 늘 정신 바짝 차리고 줄타기를 해야 하는 가여운 우리 삶의 한 조각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말 조용히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이 얼마 전 관객 5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하다가 그냥 사라질 줄 알았던 영화에 관객 발길이 이어지자, 외면했던 대형 복합상영관들까지 뒤늦게 영화를 내걸고 있다.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프랑스 그랑드샤르트뢰즈 수도원 수도사들의 일상을 담은 이 영화엔 말이 없다. 몇 마디 들어간 말도 침묵의 연장으로 들린다. 세 시간 가까이 관객들이 보는 것은 수도사들의 묵상과 기도하는 모습이고, 듣는 것은 온통 사물의 소리들이다. 나무 바닥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소박하고, 가위로 옷감 자르는 소리는 맑다. 말이 없으니 그 속엔 나만 옳은 고집의 배설이 없고, 아프게 찔리는 고통이 없다.

또다른 영화 하나. 인간의 내면을 시와 침묵의 영상으로 표현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영화 기획전도 최근 서울 한 영화관에서 시작됐다. 존재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앵글을 잡는다는 그의 영화에서도 말은 절제된다. 물길 따라 하늘거리는 수초 영상을 찍기 위해 그는 카메라 앞에서 한달을 버티기도 했다. 1986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던 해 나온 <희생>을 포함해 평생 그가 남긴 작품은 딱 7편이다. 숫자가 작으니 오히려 무겁다.

빨갱이란 단어가 다시 대놓고 등장하는 2010년 서울, 이성을 잃은 이 나라의 겨울은 너무 가볍다. 고종석의 말대로 광신이란 것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믿는 것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이라면 참 서글픈 사랑이다.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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