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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23 19:41 수정 : 2010.02.23 21:01

김종구 논설위원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한나라당 내부의 대립 양상을 보면 3선 개헌 때의 공화당 사정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 정치 역사상 대통령이 정치적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일을 여당 내부의 특정 세력이 조직적으로 반대한 예는 이 두 경우를 빼곤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시 개헌을 추진한 공화당 주류의 가장 큰 걸림돌도 야당이 아니라 여당 내의 이른바 구주류였다.

여당의 당론 조정은 그때도 최대 관건이었다. 1969년 2월3일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는 개헌 추진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토론장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개헌 반대파는 점차 힘을 잃었다. 권력의 회유와 설득, 협박은 그만큼 집요했다. 특히 중앙정보부는 반대파 의원들의 비리를 약점 잡아 이들을 각개격파해 나갔다. 요즘 한나라당 친박계 의원들에 대한 뒷조사설 등이 나오는 것을 보면 권력의 기본 정석은 똑같은가 보다. 그해 4월8일 야당인 신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공화당 내 개헌 반대파의 동조로 통과된 것(이른바 ‘4·8 항명 사건’)도 요즘 거론되는 정운찬 총리 해임건의안 문제와 연관지어 보면 흥미롭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당시 해임건의안에 찬성한 의원들 중 상당수가 반당 행위 등의 이유로 제명됐다는 사실이다. ‘세종시 당론이 정해지면 당론에 따라야 한다’고 청와대가 벌써부터 쐐기를 박고 나오는 게 꽤 심상치 않아 보인다.

40년 전 개헌 반대파의 구심점인 김종필씨 역시 당시 강력한 차기 대선주자였다. 하지만 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지금 박근혜 전 대표가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것은 권력에 굴복한 뒤 제이피(김종필씨의 애칭)가 걸어간 정치행로에 대한 학습효과 탓도 있지 않을까. 박 전 대표가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권력과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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