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현호 논설위원
|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영남에선 재상은커녕 판서도 드물었다. 선조 때의 유성룡 이래로 영남 출신 재상은 고종 때 대원군의 남인 중용책에 따라 좌의정에 오른 유후조가 유일하다. 판서도 인조 때의 정경세와 장현광, 숙종 때의 이원정과 이현일 정도가 고작이다. 그 뒤로 영남 출신의 공직 진출이 없진 않았지만 대개 하위직에 그쳤다. 손꼽히는 명문인 의성 김씨 학봉파에선 숙종 때 이후 가장 높은 벼슬이 지금의 차관보급인 정3품 참의다. 지금의 국·과장급인 교리·정언·장령·사간 등이 가장 높은 벼슬인 집안도 많다. 요직의 ‘티케이 독식’이 문제되는 요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조선후기의 그런 영남 차별은 권력투쟁의 결과다. 인조반정은 정인홍 등 북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정인홍은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유학을 이끈 남명 조식의 제자다. 숙종 때의 경신대출척(1680)과 갑술환국(1694)은 노론의 남인 대숙청이었다. 영남 선비들은 남인이 대다수였다. 1728년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영남권 일부가 가세하자, 이를 빌미로 영남 남인들은 더욱 철저히 배제됐다. 그즈음부터 영남에선 퇴계와 남명의 학문을 시대 변화에 맞추어 발전시키는 흐름이 멈췄다. 그런 소외와 차별이 길게는 300년, 짧게는 200여년이다. 감회가 응어리지지 않을 수 없는 세월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구·경북이 어떤 지역인데 만날 피해의식 갖고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피해의식은 과거의 상처나 절망으로 인한 결핍감에서 생긴다. 실제 피해의 경험이 있다면 또다른 피해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구·경북을 비롯한 지방의 피해의식에는 근거도 있다. 극심한 수도권 집중 현상과 지방경제의 몰락이 그것이다. 그 대책 중 하나라는 대구·경북 첨단의료복합단지도 지지부진하다. 불신이 응어리지지 않을 수 없게도 됐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