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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30 18:53 수정 : 2010.05.30 18:53

김종구 논설위원





삐라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전단의 잘못’이라고 나온다. 전단·광고·포스터 등을 일컫는 영어 단어 빌(bill)을 일본인들이 ‘삐루’라고 잘못 발음한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요즘에는 삐라라는 말이 언론 등에서 사라졌지만 역시 삐라는 삐라라고 불러야 제맛이 살아난다.

삐라가 우리 현대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해방 직후다. ‘해방은 삐라와 함께 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방공간은 좌우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삐라가 난무한 시기였다. 그 당시 삐라는 이념 확산과 세력 불리기의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보 공유와 소통의 중요한 매개체이기도 했다. 삐라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심리전의 중요한 수단으로 더욱 진화했다. 1969년에 중앙정보부가 펴낸 <심리전 교범>을 보면 ‘심리전의 3대 매개체’로 라디오·전단·확성기를 꼽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비중있게 다룬 것이 삐라다. ‘소리의 총알’ 못지않게 ‘종이폭탄’을 중요하게 여긴 셈이다.

장년층 이상이라면 삐라에 얽힌 추억 한 가지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뒷동산에서 주운 삐라는 두려움과 야릇한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연필 등 학용품을 받을 수 있는 ‘상품권’이기도 했다. 전방 부대에서는 삐라를 얼마나 수거했느냐가 해당 부대의 정보분야 점수를 매기는 주요한 항목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남쪽에서 제작한 삐라도 주워서 갖고 가면 매수를 똑같이 계산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쪽에서 날려보낸 풍선이 추락한 지점을 곧바로 찾아가면 ‘횡재’를 하게 된다.

대남 삐라든 대북 삐라든 공통점은 치졸함과 조악함이다. 상대방에 대한 처절한 증오감 표출, 공포심 자극, 유치한 자화자찬 등으로 점철돼 있었다. 역사의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나 싶었던 이 치졸한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니 가슴이 먹먹해 온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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