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6.16 18:41
수정 : 2010.06.1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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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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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스스로 ‘중노릇’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는 깊은 성찰과 울림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법정 스님은 “중노릇과 목수일을 간단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순수하고 무심하기로 말한다면 중노릇보다 목공일 쪽이 그 창조의 과정에서만은 훨씬 앞설 것이다. 사람끼리 어우러지는 중노릇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중생놀음’이 끼여들기 때문이다”(<오두막 편지>)라고 쓴 적이 있다.
경허 선사는 “대저 사람이란 정작 사람이 되기가 제일 어렵고, 사람이 되어도 중노릇하기 어렵다. 중이 되어도 부처님의 바른 법을 만나기 어려우니 항상 깊이 생각하고 뉘우쳐라”고 설파했다. 그런가 하면 만공 스님은 “중노릇을 게을리해서 불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마땅히 죽어서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절을 찾아 집을 떠나 부모님께 죄를 지었는데, 중노릇마저 제대로 못하면 불가에 죄를 짓는 것이다’라는 ‘양가득죄’라는 말도 있다.
최근 조계종 승적까지 버리고 떠난 수경 스님은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고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들로부터 들었는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그동안 삼보일배, 오체투지 등으로 몸을 상하면서까지 생명 지킴이 역할을 해온 그를 두고 ‘대접받는 중노릇’을 했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낮추었다. 수경 스님은 법정 스님이 입적했을 당시 쓴 칼럼에서도 “흐린 강물을 바라보며 ‘중노릇’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새겨봅니다”라고 적었다.
인간의 탐욕 때문에 곤경에 빠진 생명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길이 자신에게 주어진 중노릇이라고 여겨왔던 그가 홀연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난 이유는 뭘까. 법정 스님의 말처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중생놀음이 불교계에 끼어든 데 실망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의 빈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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