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6.28 23:33
수정 : 2010.06.28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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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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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제 잇속을 차릴 때는 겉으로나마 합법적인 절차와 형식을 갖추려 드는 법이다. <구약> 열왕기에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나온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에 정원을 만들려 했지만 나봇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자 왕비 이세벨이 꾀를 냈다. 그는 왕의 이름으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몰아붙여 돌로 쳐죽이라’는 편지를 쓰고, 왕의 도장을 찍어 나봇이 살던 도시에 보냈다. 그런 공문대로 나봇은 죽고 왕은 포도원을 차지했다.
무신집권기인 고려 명종 18년(1188년) 3월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간악한 서리들이 권신에게 아부하기 위해 (경작 중인 토지를) 유휴지라고 장부를 조작하면, 권세가는 이를 자기 땅이라고 칭하는 공문서를 구한 뒤 심부름꾼을 관청에 보내 세를 받도록 한다.” 공문서 조작을 통한 토지 탈취다. 고려말로 접어들면 아예 이런 형식조차 내팽개친다. <고려사절요> 우왕 11년(1385년) 11월 기록에는, “(권신) 임견미·염흥방 등이 악한 종을 풀어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을 물푸레나무 몽둥이로 덮어놓고 때려 땅을 뺏는 바람에, 관청에서 발급한 토지문서를 가진 사람도 항변조차 하지 못한다”고 돼있다. 고려말의 야만적 수탈을 상징하는 ‘물푸레나무 공문’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이명박 대통령 비판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린 민간인을 불법 사찰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국무총리실장 명의로 일선 경찰서에 직접 수사의뢰 공문까지 보냈다지만, 정작 총리나 총리실장은 이런 사실을 한참 동안 모른 눈치다. 애초 수사 권한도 없는 부서가 민간인을 내사하는 것부터가 명백한 불법이기도 하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는 특정 권력 실세의 사람으로 꼽히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하는 짓 하나하나가 옛날 어느 때와 똑 닮았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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