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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04 21:20 수정 : 2010.07.04 21:20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중국의 평민 지식인들이 자신의 정치철학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하기 위해 벼슬길에 나서는 출사(出仕)가 유행하기 시작한 건 봉건제도 붕괴 이후다. 신분이 세습되는 봉건제 아래서는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나라 봉건제가 붕괴하기 시작한 춘추시대 말기 이후 유가나 법가학파 지식인들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여러 신흥 제후국들을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나 찾아가 자리를 탐하지는 않았다. 특히 유가학파 지식인들은 덕정(德政)을 베풀 뜻이 없는 군왕한테는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출사가 벼슬을 밥벌이로 삼아 권력을 누리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거나 “학술적 양심과 이성으로 군왕을 설득해도 안 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맹자도 자신의 이상을 실행할 수 없을 때는 “개인적인 인격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조용히 은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이인호 새로 씀 <사기열전>)

우리나라 대표적 지식인 중 한 명인 정운찬 총리가 출사한 지 1년도 못 돼 ‘세종시법 수정안’ 국회 부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됐다. 지난해 정 총리가 출사를 결심한 건 세종시법 수정, 4대강 사업 등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정책에 동의해서였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들 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셌다. 더구나 현실정치의 복잡한 셈법을 푸는 건 애초부터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 총리는 이 대통령을 ‘역경을 극복하고 오늘을 만든, 우리 시대의 성공 모델’이라고 치켜세우며 벼슬길에 올랐다. 대다수 국민의 뜻과 괴리된 세종시법 수정이나 4대강 사업 강행 등을 이 대통령의 ‘덕정’이라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덕정’과 ‘악정’을 구분하지 못한 지식인의 출사가 어떤 결말에 이르는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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