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7.28 20:54
수정 : 2010.07.28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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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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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가 ‘장관법률특보’라는 외교관 신분으로 스위스 베른의 미 공사관에 도착한 것은 1942년 11월10일 오후였다. 바로 몇 시간 뒤 스위스의 대표적인 일간지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인 사절’이 ‘특별한 임무’를 띠고 베른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미 전략사무국(OSS, 중앙정보국의 전신)의 스파이 두목이 왔으니 바야흐로 나치 독일에 대한 비밀작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투였다.
신분이 공개됐는데도 덜레스의 활동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광고 효과가 더 컸다. ‘히틀러의 문간’으로 불린 그의 사무실은 스파이활동을 사고파는 가게인 양 번성했다. “기사가 나간 뒤 내 방에는 여러 유형의 정보 제공자들, 자원자나 모험꾼, 프로와 아마추어, 좋은 사람과 나쁜 놈들이 찾아왔다.” 나치 독일에 반대하는 온갖 사람들과 정보가 베른에 몰려있던 탓이다. 덜레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중요 정보를 얻어냈다. 독일 군부 내 히틀러 암살 조직과도 접촉했다고 한다.
외국에서 정보를 탐지하는 정보기관원 가운데 덜레스처럼 외교관이나 정부 관리로 위장한 경우를 ‘공직 가장 정보관’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백색 스파이다. 사업가·관광객 등 비공직 가장 정보관, 곧 흑색 스파이와 달리 첩보활동을 하다 들켜도 처벌 대신 추방되는 데 그친다. 백색 스파이는 주재국의 첩보대상들과 상대적으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우편함’ 구실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상대국 방첩기관의 철저한 감시를 받기 마련이다. 폐쇄적인 나라에선 덜레스처럼 행복한 백색 스파이는 기대하기 힘들다.
스파이 혐의로 주리비아 대사관의 국정원 직원이 추방됐다. 그 때문에 수십년 공들여온 두 나라 관계가 크게 어긋났다. 국가적 손실도 크다. 얼마나 어설프게 행동했으면 이런 꼴이 날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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