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8.09 22:41
수정 : 2010.08.09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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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구 선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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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천사를 보여다오. 그러면 천사를 그려줄게.” 리얼리즘의 선구자인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상 속의 소재를 그리는 걸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고향인 오르낭에서 열린 아저씨 장례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오르낭의 장례식>(1849~50년)으로 ‘낭만주의 장례식’을 치렀다.
유럽에서 태동한 리얼리즘은 19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아시아에 영향을 끼친다. 리얼리즘 세례를 받은 아시아 화가들은 아시아의 토속적인 자연, 인물 그리고 역사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그런 작업의 결과물들이 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중이다. 한·중·일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10개국의 작품 104점은 당대인들의 삶의 모습이자 역사의 기록들이다.
당시의 전쟁과 식민지 경험은 아시아 리얼리즘 작가들이 비켜갈 수 없는 아픈 현실이었다. 이인성의 <해당화>(1944년)는 애타게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4년 6월 눈을 감은 만해 한용운의 시 ‘해당화’와 연결돼 있다. 해당화를 앞에 두고 뭔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여인네의 애절한 눈빛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갈망했던 만해를 떠올리게 한다. 필리핀 데메트리오 디에고의 작품 <카파스>(1948년)는 일본군에 항복한 미군과 필리핀 전쟁포로들의 참상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라덴 살레의 <푼착고개>(인도네시아), 페르난도 아모르솔로의 <모내기>(필리핀), 아사이 추의 <농부 귀가>(일본) 등 이국적인 자연 풍경과 생활상도 눈길을 끈다. 처음으로 외국 나들이에 나선 다카하시 유이치의 <오이란>(일본)과 라자 라비 바르마의 <달빛 속의 여인>(인도), 참라스 키엣꽁의 <나의 학생>(타이) 등을 통해 19세기와 20세기를 살았던, 약간 생소하면서도 어쩐지 친근한 아시아 이웃들을 만나볼 수도 있다. 당대를 꼼꼼하게 그려낸 아시아 리얼리즘 작가들 덕분이다.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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