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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10 18:00 수정 : 2010.08.10 18:00

여현호 논설위원

한국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힌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가 8월10일 발표됐다. 한국 합병 100년에 맞춘 것이라면 합병조약 체결일인 8월22일이나 공표일인 8월29일, 또는 식민지배 종식일인 8월15일이 어울릴 듯한데, 그런 날들을 모두 피했다. 자칫 특별한 의미가 부각될까 우려한 때문이라고 한다. 세심한 택일이다.

8월10일도 예사로운 날은 아니다. 1945년 8월10일은 일본이 심야 어전회의 끝에 연합국의 ‘포츠담 항복권고 최후통첩’을 수락하기로 결정한 날이다. 곧, 항복 결정이다. 이 결정은 10일 아침 6시45분 스위스와 스웨덴 주재 일본공사관을 통해 미국·중국·영국·소련에 통보됐다. 저녁 8시에는 <동맹통신>과 <엔에이치케이> 해외방송이 수락선언 전문을 해외로 보냈다. 스위스 <바젤신보>는 이를 받아 ‘일본 항복’이란 제목으로 호외를 냈다. 세계 언론에선 이날로 일본 항복이 기정사실이 됐다.

8월10일에 이어 14일에는 히로히토 일본 왕이 종전조서에 서명했다. 15일 정오 일본 왕이 라디오 녹음방송에서 읽은 것도 이 종전조서다. 9월2일에는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 서명식이 열렸고, 같은 날 일본 왕의 항복조서가 발표됐다. 전쟁 종식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이렇게 여럿인데도, 일본은 ‘옥음방송’이 있었던 8월15일만 내세우고 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전후해 9월2일 항복기념일 관련 기사는 자취를 감췄고, 1955년부터는 방송과 신문이 대대적으로 8·15 종전기념일 기획을 펼쳤다. ‘항복’의 나쁜 기억 대신, ‘천황의 옥음’으로 고통스런 전쟁이 끝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려 했던 ‘역사와 기억의 선택 작업’이다.(사토 다쿠미, <8월15일의 신화>)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날짜까지 가려가며 세심하게 역사를 저울질한다. 국치 100년인 우리는 어떤가.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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