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8.18 20:46
수정 : 2010.08.1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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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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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에서 진실(veritas)의 반대말은 거짓(falsum)이 아니라 망각(oblivio)이라고 한다. ‘진실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 되는 셈이다.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 역시 부정어 ‘a’와 망각을 뜻하는 레테이아(letheia)의 조합으로 돼 있다.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썼다. 주인공 미레크는 자신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권력에 의한 과거 지우기 작업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중국의 반체제 물리학자 팡리즈는 “통치권력이 그동안 자유로운 사고를 한 여러 세대의 중국인을 계속 진압해 왔으나 뒷세대 사람들은 앞세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썼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행을 잊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의 절반을 얻은 것이다”(에우리피데스), “제때에 잊을 수 있는 능력은 제때에 기억할 수 있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니체) 등의 말도 있다. 그래서 망각의 기술이라는 말도 있는 모양이다. 1962년에 발표된 한 의학보고서를 보면, 세레세프스키라는 환자는 자신이 잊고 싶은 내용을 종이에 적은 뒤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불태우는 방법으로 불필요한 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그런 힘든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이 편의에 따라 쉽게 망각하는 뛰어난 뇌구조를 갖고 있는 듯하다. 고위공직자 비리 문제에 대해 과거와 180도 다른 한나라당의 태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게다가 앞으로 인사청문회가 열리면 또 얼마나 많은 망각증 환자들을 보게 될 것인가. 대중의 뇌리에는 아무리 불태워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또렷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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