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9.06 18:36
수정 : 2010.09.0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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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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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덕에 관직에 오르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황수신은 젊은 시절 과거시험을 치르는 도중 시험관한테서 학문이 형편없다는 말을 듣고 분개해 붓을 던지고 나와버렸다. 뒤에 아버지 후광을 입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가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것을 평생 탄식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문관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문주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큰 술잔에 술을 가득히 따라 권하며 상대방을 ‘선생’이라 호칭했는데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렀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모임을 피했으니 이는 대인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함이었다”고 <필원잡기>는 적고 있다. 음서 출신자들은 또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이른바 ‘청요직’(淸要職)에는 기용되지 않았다. 영조가 예순여섯에 열다섯 살의 정순왕후와 혼인한 뒤 오빠 김귀주를 음서 출신인데도 사간원 정원에 임명한 것을 두고 “어린 아내에게 빠져 판단이 흐려졌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저한 문벌귀족사회인 고려에 비하면 그나마 조선시대에는 음서제도가 약화됐다고 하지만 오십보백보가 아닐까 싶다. 집안을 보고 벼슬을 주는 제도를 둔 것부터가 그렇다. 그렇다면 과거제는 어땠는가. 조선시대 500년 동안 문과에 합격한 1만5000명을 분석해 보니 하위 560개 씨족이 배출한 급제자는 10%뿐이고 상위 30개 씨족이 전체 급제자의 50%를 차지했다고 한다. 과거제 역시 기존 지배층의 사회진출을 추인하는 수단이 돼버린 것이다. ‘현대판 음서제도’라는 말이 나오는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딸 특채를 계기로 ‘공정한 사회’ 논란이 불붙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심화 양상을 보면 단순히 특채 제도 정도를 손봐서 될 일이 아닐 듯하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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