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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0.18 20:02 수정 : 2010.10.18 20:02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환율 개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차대전 이후였다. 전후 금융위기를 겪은 프랑스은행은 1925년 말부터 프랑을 매각하고 외화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1달러당 25프랑 이하로 프랑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다. 당시 금본위제를 유지하던 국가들은 이런 식의 환율 개입을 상상할 수 없었다. 평가절하 이후 프랑스에선 수출이 급증하고 외화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10억달러도 안 되던 외환보유액은 1930년 30억달러로 급증했고, 프랑스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금본위제를 고수하던 영국에선 막대한 자본과 금이 프랑스로 빠져나갔다. 파운드화 가치가 고평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해법은 금리를 올리는 것이었지만 기업 파산과 실업 우려 때문에 시행할 수 없었다. 영국 경제의 목줄을 프랑스가 틀어쥐게 된 셈이다. 프랑스와 신경전을 벌이던 영국은 견디다 못해 1931년 9월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파운드화의 가치는 며칠 만에 25% 하락했다. 사실상의 평가절하였다. 파운드화를 보유하고 있던 나라들은 큰 손실을 봤다. 특히 프랑스의 피해가 컸다.

미국에도 불똥이 튀었다. 다음 차례는 미국이라고 판단한 유럽인들이 달러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은행들은 지급불능 위기에 몰렸고, 대공황은 더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4월 금본위제를 폐지해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그렇게 해서 경제회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대공황과 2차대전의 배경에는 이처럼 열강들의 보이지 않는 환율전쟁이 있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환율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환율전쟁은 보호무역주의와 무역전쟁을 불러 많은 나라를 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게 된다. 금융위기 이후의 환율전쟁이 대공황 때의 환율전쟁과 닮은꼴이라는 점이 걱정된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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