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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16 20:50 수정 : 2010.11.16 20:50

권태선 논설위원

3년8개월에 걸친 광화문 복원공사의 부실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애초 공기를 무리하게 앞당길 때부터 우려됐던 사태가 완공 3개월도 안 돼 현판의 균열로 나타났고, 이제는 현판에 쓰인 목재가 금강송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온갖 역사적 풍파를 겪고 제 모습을 찾았다고 환호한 것도 잠시, 광화문은 또다시 후손들의 경망함 때문에 오욕을 뒤집어쓰고 있다.

조선 태조 때 경복궁의 정문으로 세워진 광화문의 원이름은 오문(午門)이었다. 정도전은 그 뜻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함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모든 바른 것 중에서도 큰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세종 8년 집현전 학사들의 의견에 따라 광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화(光化)의 어원으론 태평성대를 뜻하는 광천화일(光天化日)이란 설과, 나라의 위엄과 덕이 만방에 널리 미친다는 <서경>의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이란 설 등이 엇갈린다.

이런 염원에도 광화문은 우리 역사의 영욕을 비켜가진 못했다. 조선총독부 건물로 앞을 막는 등 경복궁을 훼손·유린했던 일제는 1926년 광화문을 해체해서 경복궁 동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6·25 때는 목재 부분이 소실되고 석재만 남았다. 다시 남쪽으로 옮겨 복원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68년 복원된 광화문은 목재가 아닌 철근콘크리트 기둥에 서까래를 얹은 모습이었다. 편액 역시 대통령의 한글 친필로 바뀌었다. 방향도 지금은 헐린 옛 총독부 건물에 맞추느라 경복궁 축에서 3.75도쯤 서쪽으로 기울고 뒤로 10m 정도 물러났다.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조급증 탓이었다. 이번 복원은 그런 과거를 반성하고 우리의 문화적 성숙을 보여줄 기회였다. 하지만 70년대식 개발주의 사고에 젖어 있는 현 정권에 기대하기엔 무리였던 것 같다.

권태선 논설위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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