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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수에즈운하 |
지중해와 홍해를 잇겠다는 구상은 기원전부터 존재했다. 최초의 운하 시도는 기원전 19세기 세누스레트 3세 때였다.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세누스레트 3세가 나일강을 150㎞가량 떨어진 홍해와 연결하려 했고, (이집트를 점령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도 똑같은 시도를 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작으나마 물길을 내는 데 성공한 사람은 기원전 3세기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다. 그는 나일강에서 현재 수에즈운하가 지나가는 비터호까지 90㎞의 길이에 폭 30m, 깊이 10m의 물길을 냈다.
근대 들어서는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한 뒤 운하 건설을 시도했다. 그러나 홍해의 수위가 지중해보다 10m나 높다는 조사 결과 때문에 공사를 포기했다. 갑문을 만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조사였다. 파나마운하와 달리 홍해와 지중해는 수위 차이가 없었다.
운하를 완공한 사람은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였다. 그는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영국의 끈질긴 방해 공작을 물리치고 1869년 11월 운하를 완성했다. 이후에도 운하 운영권을 둘러싼 영국, 프랑스, 이집트의 갈등은 계속됐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56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국유화 선언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집트를 침공하게 한 뒤 분쟁 해결을 이유로 군대를 파견해 운하를 접수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계획이 무산되면서 운하 운영권은 이집트의 손으로 돌아오게 된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화하면서 수에즈운하 폐쇄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국제 원유값이 급등하고 있다. 국제 물류의 목줄인 수에즈운하의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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