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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16 19:33 수정 : 2011.03.16 19:33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31년에 낸 <긍정자·부정자>는 일본의 전통극인 노(能)의 하나인 <다니코>(谷行)를 번안한 희곡이다. 15세기 중엽 곤파루 젠치쿠(시치로 우지노부의 예명)가 쓴 원작은 이렇다. “산속 수행 집단에 참가한 소년이 도중에 병이 났다. 이들의 ‘대법’(大法)에선 이런 일은 전생의 업보여서 산 채로 ‘골짜기에 떨어뜨리게’(谷行) 돼 있었다. 소년이 죽은 다음날 그 스승의 호소에 감동한 일행이 소년의 소생을 기도했고, 부처님의 자비로 소년은 되살아난다.”

브레히트는 원작의 종교적 순례 여행을, 마을에 도는 전염병 약을 구하러 가는 여행(<긍정자>) 또는 연구여행(<부정자>)으로 바꿨다. 골짜기에 내던져지게 된 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자>에선 소년이 집단의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해 죽는 것으로 했지만, <부정자>에선 소년이 낡은 관습을 거부해 결국 살아서 귀환하는 것으로 썼다. 관객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 두 연극을 보면서 집단의 대의, 사회적 관습 따위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곧,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방사성 물질의 방출이 계속되고 있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사고 현장에는 직원 50명만 남아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사투를 계속하고 있다. 그들이 폭발을 막는 데 실패하면 일본 전체가 엄청난 위험에 빠진다. 그들 자신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간 나오토 총리가 “원전에서 철수란 있을 수 없다. 각오를 단단히 해달라”고 말한 것도 비장한 분위기를 더한다. 마치 옥쇄를 앞둔 사무라이들 같다.

일본 사회의 집단의식은 뿌리가 깊다. 소속 집단이나 조직의 존속을 위해 필요하다면 개인의 희생은 오히려 당연시된다. 옥쇄, 할복, 가미카제 등은 그런 문화의 산물이다.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집단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가? 아픈 역사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질문이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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