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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11 20:09 수정 : 2011.04.11 20:09

곽병찬 논설위원

애덤 스미스는 초기의 대표적인 저서 <도덕 감정론>(1759년)에서 인간은 도덕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는 신념을 드러냈다. 개인들이 집단의 이익에 관해 어떤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면, 집단의 이익에 역행하는 구성원의 행동은 억압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경꾼들이 반사회적 행동을 응징하기 위해 개입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국부론>(1776년)에서,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힘은 이기심이라는 관점을 체계화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국부도 창출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양조장, 빵 제조업자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다.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이기심) 덕분이다.”

둘 사이엔 건너기 힘든 간극이 있다. 앞의 책에서 그는 인간의 본성은 이타적이라는 이상주의적 관점에 서 있지만 뒤에선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라는 관점을 분명히 했다. 사회를 보는 관점 역시, 개인들에 의해 신중하게 보호되는 공공재이거나, 아니면 개인의 사리 추구에 따른 부작용으로 나뉜다. 이런 단절에 대해 브루노 바우어 등 19세기 독일 학자들은 빈정거리는 투로 ‘애덤 스미스 문제’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사실 지금은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상주의적 관점은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심리학이나 생물학에서도 이타심이란 위장된 이기심이라고 설명한다. 기셀린 같은 학자는 관용·박애·동정·연민 등의 미덕 또한 사적 이익 추구의 한 수단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은 부작용이 너무 크다. 진술은 규범의 성격을 갖는다. 이기심을 부추긴다. 이제 개인과 공동체의 존립이 위협받을 정도가 됐다. 무엇이 옳은가, 무덤 속 스미스가 답해야 하나?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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