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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10 19:12 수정 : 2011.08.10 19:12

철학자 칸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로부터 종교철학 문제를 더는 언급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고 “국왕 폐하의 충직한 신하로서 앞으로 종교에 관한 공개강연과 저술활동을 일절 중지하겠다”고 서약했다. 몇 년 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칸트는 그 약속을 철회했다. ‘국왕의 충직한 신하’일 때만 지킬 의무가 있는 서약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칸트는 “국왕의 생존 시에만 자유를 빼앗기도록 신중하게 말을 골라 대답했다”고 술회했다.

말솜씨가 뛰어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게는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간다고 해서 ‘슬릭 윌리’(Slick Willy)라는 별명이 붙었다. 마리화나 문제에 대해 “흡입하지는 않았다”(I didn’t inhale)는 교묘한 답변으로 빠져나간 것 등은 유명하다. 클린턴은 르윈스키와의 관계에 대해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뒤에 ‘부적절한 관계’를 시인하고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구강을 사용한 행위이므로 직접적인 성관계는 아니라는 변명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클린턴의 이런 행위를 ‘오도성 진실’이라고 말하면서 칸트의 도덕이론을 설명하는 소재로 활용했다.

민주당 비공개 회의 도청 의혹과 관련한 한국방송의 태도를 보면 자꾸만 클린턴의 모습이 연상된다. 김인규 사장이 “도청을 지시한 적도, 도청을 했다고 보고받은 적도 없다”고 말한 것이 좋은 예다. ‘지시와 보고가 없었다’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 도청 행위를 부정하지는 않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법적 대응” 운운하는 것을 보면 클린턴보다 훨씬 질이 떨어진다. 샌델은 “오도성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에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칸트는 보았다”고 설명했지만 한국방송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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