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레카] 아리미쓰의 전후처리 / 노형석 |
1933년 4월 경주읍 노서리 밭에서 한 촌부가 땅을 파다가 신라 옥구슬들을 발견했다. 이미 경주 금관총, 서봉총 등에서 금관 등이 출토된 터라, 총독부는 조선고적연구회 연구원이던 26살의 아리미쓰 교이치(1906~2011)를 급파했다. 그는 순금제 귀고리 등을 더 발굴했다. 금관은 없었지만 추가 발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드러난 거대한 석단이 유적 옆 또다른 140호분을 두른 호석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봄 아리미쓰는 한국에 남아 국립박물관의 첫 발굴을 이끌었다. ‘국내에 당신만큼 아는 이가 없다’는 간청 때문이었다. 발굴지로 택한 경주 호우총, 금령총은 13년 전 조사하리라 마음먹었던 그 140호분이었다. 광개토왕 이름을 새긴 5세기 고구려 청동그릇(호우)과 목심칠면(화살통) 등 놀라운 유물들이 줄줄이 나왔다.
숙원을 풀고 그해 6월 귀국선을 탔지만, 아리미쓰의 머릿속은 ‘전후처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서리 고분 등 지난 10여년간의 유적 조사 내용을 보고서로 펴내 한국 학계에 전하는 것이 필생의 목표가 됐다. 교토대 교수를 지낸 그는 조선을 떠난 지 50여년 만인 2000~2002년 <조선고적연구회 유고> 1, 2편을 내며 전후처리를 끝낸다. 그리고 지난해 105살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의 아리미쓰 추모자료 전시(6월2일까지)에선 1978년 그가 쓴 원고 한 장이 눈길을 붙잡는다. “… (조선에서 조사한 유적들을) 출판물로 공표하지 못하면 내 전후처리는 완료되지 않은 것이다. … 계획 달성에 전념할 것을 다짐한다.”
최근 일제 징용피해자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일본 정부는 “1965년 일한협정 당시 끝난 일”이라고 발뺌을 거듭했다. 그들의 ‘전후처리’는 언제 끝날지,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