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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이리가라이와 여성성 / 정영무 |
주디스 버틀러는 남녀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며 성별 이분법을 해체했다. 남성 대 여성이라는 구도 아래 여성 해방을 주도하던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를 치받은 것이다. 버틀러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특징을 지녔더라도 젠더상 여성인 존재가 나올 수 있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사회·문화적 성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성도 문화적 제도적 힘 속에서 구성됐다고 본 것이다.
버틀러가 성차별을 부정하고 양성평등주의를 제창한 데 반해 뤼스 이리가라이는 여성의 정체성을 남성과 다르게 봤다. 감기 바이러스 같은 작은 생명체가 침입해도 온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만 예외가 하나 있다. 이리가라이가 주목한 그것은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임신이다. 자궁 속의 태아는 우리 몸에 침입하는 이물질처럼 자신이 아닌 것, 타자로 경험된다. 그럼에도 여성은 생명이 자라도록 관용하며 타자와 공존한다. 임신 경험이 아니더라도 여성은 온몸이 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생리를 경험한다.
이리가라이는 인간의 문명이 그러한 여성적 감수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일성에 집착하는 남성적 문명이 갈등과 폭력을 낳는다면, 차이를 긍정하는 여성적 문명은 공존과 화해를 가능하게 한다. 양성평등주의는 남성사회로의 편입에 불과하며, 여성은 자신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언어를 대표로 하는 상징체계로 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은 시대적 컨센서스여서 누군가 굳이 여성성을 강조한다면 이리가라이에게 눈길이 간다. 여성의 언어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 사형제 등 가장 남성적인 언어구조를 갖고 있으면서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성을 앞세운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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