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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후천개벽 / 백기철 |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1970년 발간된 김지하의 첫 시집 <황토>에 실린 ‘황톳길’이란 시의 도입부다. 서슬 퍼런 박정희 독재 시절 ‘애비가 죽어나간 황톳길을 걷는 아들’의 이미지는 매우 투쟁적이다. 이처럼 저항의 상징이었던 김지하가 ‘생명의 시인’이 된 지는 제법 오래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70년대 중반 인혁당 고문 사실 폭로로 재수감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쇠창살 틈에 풀씨가 날아와 파랗게 자라는 것을 발견한 날, 웅크린 채 소리 죽여 얼마나 울었던지! 그저 ‘생명’이라는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96년에 나왔다가 2003년에 재출간된 <생명학>에서 김지하는 생명사상이 옥중에서 시작됐다고 적었다.
그의 생명사상에서 여성성은 매우 중시된다. 후천개벽은 선천원형(주역의 태극·군자·중국·남성 중심의 코스모스론)을 해체·재구성하여 선·후천이 공존하는 기우뚱한 균형인데, 여성, 여성성, 모성, 사랑과 대지의 생명학이 남성, 남성성, 부성, 도덕과 하늘의 이법(理法) 자리에서 통치하면 으뜸으로 좋다. 새 문화와 문명 창조의 주체는 바로 여성이요, 어머니요, 할머니이다.(<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2005년)
이렇게 보면 김지하가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하는 강연을 한 것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그는 강연에서 “이제는 여자에게 현실적인 일을 맡길 때입니다. 나는 여성의 현실통어 능력을 인정합니다”라고 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김지하 생명사상의 깊이를 알 길은 없다. 장자 말대로 대붕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대문호의 사상을 좌우의 편협한 시각에서 재단할 일도 아니다. 다만 대시인의 발끝에서 작은 이익이라도 취하려 드는 속세의 사람들이 야속할 따름이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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