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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05 19:21 수정 : 2013.05.06 15:39

김한길이 4일 민주당 대표로 뽑히기 하루 전 문성근은 민주당을 탈당했다. 김한길 대표 아래서는 단 하루도 당원으로 있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둘 다 남다른 아버지를 뒀다. 김철 통일사회당 당수와 문익환 목사다. 아버지 때문에 둘 다 195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다.

두 아버지는 애초 보수였다. 김철은 해방공간에서 조선민족청년단에 가입했고, 문익환은 정전회담 때 미군의 통역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에 맞서면서 둘은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유신 정권에 타격을 입힌 두 차례의 ‘선언’을 주도하는 과정은 둘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1974년 ‘민주회복 국민선언’이 기독교회관에서 기습적으로 발표되고 이어서 한 달 뒤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발족한다. 이때 김철은 새벽과 야음을 틈타 윤보선 등 참여 인사를 개별적으로 만나 서명을 받는 등 전 과정을 주도한다. 문익환은 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이끌어냈다. 비장한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문익환은 파티에 초대하듯 천연덕스럽게 참여를 권유해 오히려 거절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둘은 80년에 차이를 보인다. 문익환은 그해 내란예비음모죄로 다시 복역한 반면, 김철은 전두환의 5·18 쿠데타 뒤 입법회의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신군부의 주문을 들어주지 않아 바로 관계가 단절된다.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의 태도도 달랐다. 문성근은 아버지의 충직한 조수였다. 3·1 민주구국선언 때부터 심부름을 도맡았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때는 공판정에 녹음기나 필기도구를 못 가져가게 하자, 김대중의 진술을 외워 나와선 그걸로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 김한길은 갈등한 편이다. “통일이고 민주화고 자식들한테도 좀 신경을 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들면 말없이 한숨만 쉬셨다”는 게 김한길의 회고다.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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