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30 19:11
수정 : 2013.10.30 19:11
1968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목포시는 최초의 시민장을 치러주며 그에 대해 최상의 조의를 표시했다. 영결식엔 목포 시민 3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의 가는 길에 ‘목포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고 한다.
‘고아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윤학자(일본 이름·다우치 지즈코)씨는 7살 때인 1919년 조선총독부 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왔다. 목포에서 유달초등학교와 목포여고를 졸업한 뒤, 당시 ‘거지왕’이란 별명을 지닌 윤치호씨가 세운 공생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1938년 윤씨와 국제결혼을 했다. 공생원은 1928년 윤치호씨가 목포의 다리 밑에서 추위로 떨고 있는 어린이 7명을 데려다 키운 데서 출발한 고아원이다.
해방이 되자 남편은 친일파라는 이유로, 부인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더욱 큰 어려움은 6·25전쟁과 함께 찾아왔다. 고아들이 먹을 식량을 구하러 광주로 나갔던 윤치호씨가 행방불명되면서 윤학자씨가 홀로 공생원을 꾸려나가야 했다. 당시 공생원엔 전쟁으로 늘어난 고아가 500명이나 되었다. 윤학자씨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손수레를 끌고 구걸을 하며 이들을 먹이고 교육했다. 윤씨가 숨질 때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고아는 모두 3천여명. 이런 윤씨의 헌신적 자세에 목포 시민이 감동했고, 어려운 시대에 한-일 사이의 우호를 잇는 튼튼한 다리가 되었다.
그의 탄생 10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30일 저녁 서울 한복판 프레스센터에서 <‘갯가의 성녀’ 윤학자 탄생 101주년에 생각하는 한일>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31일은 그의 생일이자 45번째 기일이기도 하다.
지금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가장 냉랭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보다 훨씬 두 나라 관계가 나빴던 시기에 반목과 갈등, 증오와 질시를 사랑과 희생, 인간애의 실천으로 돌파했던 윤학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두 나라 모두 ‘윤학자 정신’이 아쉬운 때다.
오태규 논설위원, 페이스북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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