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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일왕이 정치를 안 한다고? / 김의겸 |
일본의 한 초선 의원이 아키히토 일왕에게 후쿠시마 원전의 실상을 알리는 서한을 전달했다가, 보수 쪽으로부터 의원직 사퇴를 요구받고 있다. 정치 개입이 금지된 일왕을 ‘무엄하게도’ 정치에 끌어들였다는 이유다.
일본 헌법 4조를 보면 일왕은 헌법에서 정하는 국사만 수행하며, 국정에 관한 기능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하지만 아키히토의 아버지 히로히토를 보면 ‘정치 9단’ 뺨친다.
히로히토는 일본이 패망한 뒤 점령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와 1945년 9월27일 첫 번째 회담을 시작으로, 1951년 4월 맥아더가 해임될 때까지 모두 열한 차례 회담을 열었고, 맥아더의 뒤를 이어 부임한 리지웨이와도 일곱 차례에 걸쳐 회담을 했다. 사실상 정상회담이었다. 일왕에 대한 일본인들의 맹목적 순종을 이용하려는 맥아더와 이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천황제를 사수하려던 히로히토의 거래는 맞아떨어졌다. 1945년 6월 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정서는, 일왕 처형 33%, 전범 재판 17%, 수감 11%, 국외 추방 9%, 무죄 3%로 히로히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런데 고도의 협상력을 발휘해 자신과 왕실의 생명을 살려낸 것이다.
이어 히로히토는 미군의 ‘영구적’ 주둔을 위해 정치적 개입을 서슴지 않는다. 일왕의 측근이 미국 쪽에 전달한 문서를 보면 “천황은 미국이 오키나와 외에 류큐열도의 군사 점령을 계속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천황은 25년이나 50년, 또는 그 이상 주일미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히로히토의 이런 행위는 명백히 위헌인데도 1960, 70년대까지 이어진다.(<히로히토와 맥아더>,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왕실 보전에 대한 히로히토의 집착은 2차 대전 중에 시작됐다. 1945년 2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조기 종전을 제안했는데, 히로히토는 ‘국체호지’(천황제 유지)의 보증이 없다며 물리쳤다. 그 결과 두 발의 원폭이 일본 영토에 떨어져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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