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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검열 / 최재봉 |
국문학자인 한만수 동국대 교수가 쓴 책 <잠시 검열이 있겠습니다>(개마고원)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자행한 검열의 풍경을 보여주는 소설 둘이 소개돼 있다. 장편 <고향>의 작가 이기영의 단편 <돈>과 단편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의 또 다른 단편 <땅속으로>다.
<돈>에서 주인공인 소설가는 어린 아들이 중병에 걸렸지만 병원비가 없어 제대로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일을 당한다. 그는 장례비를 마련하고자 아들의 차가운 주검 곁에서 밤을 새워 소설을 쓴다. 새벽에 탈고한 원고를 돈으로 바꿔 오라며 친구 편에 보냈는데, 저녁에야 돌아온 친구는 풀이 죽어 있다. 검열에 통과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출판사들이 모두 난색을 표하더라는 것.
<땅속으로>의 주인공인 소설가도 생활비가 필요해서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선인세를 받아 쓴다. 얼마 뒤 잔금을 받고자 들른 그에게 출판사 관계자는 뜻밖의 말을 한다. 원고는 불온하다며 압수되었고 곧 작가까지 소환하리라는 것. “그렇지 않아도 말썽이 될 만한 것은 다 빼었는데 무슨 이유로?” “글쎄 아마 미워서 그런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먼저 받아간 돈은 돌려주셔야….”
이 소설들을 소개하면서 한 교수는 이렇게 쓴다. “이기영과 조명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검열이란 단지 권력에 의한 강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들을 더 강력하게 옭매었던 것은 오히려 자본의 힘이었다. 출판자본은 발표 지면과 원고료라는 두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 그러니 원고료와 발표 기회를 제공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당근과 채찍이었다.”
작가들의 소설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게재 거부한 <현대문학>의 처사는 명백한 검열이다. 젊은 문인들이 만든 ‘우리는 <현대문학>을 거부한다’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 ‘againstcens’는 검열에 반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상황은 다행히 수습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이번 사태가 검열의 폐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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