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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성냥공장 아가씨 / 손준현 |
일제강점기 인천에 성냥공장이 있었다. 공장에는 ‘여직공’이 있었다. 해방 뒤 대한민국 병영의 젊은이들은 침상에서 반합 뚜껑을 두드리며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를 불렀다.
1917년 인천 송림동에 ‘조선인촌주식회사’가 문을 열었다. 인촌(燐寸)은 성냥이다. 성냥개비로 쓸 목재는 백두산 소나무였다. 압록강까지 뗏목에 실려온 목재는 신의주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경성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왔다. 송림동 일대 달동네 출신 소녀들에게 성냥공장은 소중한 일터였다. 성냥불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생명의 불이었다. 소녀들이 성냥을 만들지 않았다면, 가족은 안데르센 동화의 ‘성냥팔이 소녀’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성냥개비에 인(燐)을 붙이거나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넣었다. 하루 13시간 노동의 대가는 초라했다. 혹시 성냥을 몰래 가져 나와 파는 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젊음을 주체할 수 없던 대한민국 병영에서는 성냥공장 얘기를 ‘저속하게’ 뒤틀었다. “하루에 한 각 두 각 일 년에 열두 각,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후략).” 노랫말엔 생계를 어린 여성에게 의탁한 식민지 남성의 왜소한 마조히즘이 담겼다. 마조히즘은 곧 엉뚱한 사디즘으로 돌변해 ‘여직공’을 조롱했다. 성냥공장 아가씨들은 굳센 노동자였다. 1931년 8월26일치 <동아일보>를 보면, 노동기본권과 임금 인상을 내걸고 파업에 나선 이들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조선인촌주식회사 여직공 170명 전부는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고 한다. 성냥껍질 1만개를 붙이는데 1원70전씩 주던 품삯을 돌연 1할 감할 뜻을 발표하자, 이렇게 품삯이 내려서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창작 뮤지컬이 이달 19일까지 서울 대학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를 배경으로 했지만, 초점은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1960~70년대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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