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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5.03 18:38 수정 : 2015.05.03 18:38

고객이 맡긴 돈으로 대출을 해주고 이자수익을 챙기는 게 은행의 가장 중요한 업무라 생각하겠지만, 근대 은행업 태동 당시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은행(bank)이란 단어 역시 이탈리아말로 ‘좌판’을 뜻하는 방카(banca)에서 따왔다. 16세기 이탈리아 북부도시 곳곳에 좌판을 펼쳐놓은 이들은 외국 돈이나 어음을 바꿔주는 환전상이었다고 한다. 신대륙 항로가 열리기 전까지 유럽인들에게 가장 긴 무역항로는 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는 바닷길이었다. 이탈리아 도시를 떠난 무역선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물건을 내린 뒤 수입품을 싣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려면 최소한 6개월이 걸렸다. 무역업자 입장에선 그만큼 위험성도 크고 자금이 일정 기간 묶이는 불편함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정에서 등장한 게 바로 환전상이자, 말 그대로 무역어음 할인업자들로, 이들이야말로 바로 근대 은행업의 창시자들이다. 은행 본연의 업무가 단순한 ‘돈놀이’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에 반해 돈을 꿔주고 이자를 챙기는 대금업은 중세 시기까지도 불온한 행위로 철저하게 금기시되었다.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른다는 이유에서다. 사람(노예)은 사고팔지언정 돈이 돈을 낳을 수는 없다는 게 중세까지의 독특한 사회규범이었다. 그래서 대금업은 사회의 하층민 일부가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만 담당하는 일로 여겨졌다. 대표적인 게 유대인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엔 몬주익이란 지역이 있다. ‘유대인의 산’이란 뜻으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당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낸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가파른 몬주익 언덕을 오르며 마지막 역주를 하던 모습으로 유명하다. 당시 사회가 금기시하던 대금업으로 돈을 버는 유대인들을 일반 시민들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특정 장소에 모여 살도록 한 흔적이다.

서구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금융부문의 탐욕에 대한 반감이 종종 반유대인 정서로 폭발해버린 것도, 국내 대표은행들이 여전히 손쉬운 이자수익놀이에만 매달리는 것도, 오랜 금융의 역사에 비춰보면 전적으로 온당치만은 않다.

최우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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