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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먼저 꿈을 향해 대시해봐.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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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A 당신이 먼저 꿈을 향해 대시해봐 서른한 살 먹은, 허울마저 초라한 프리랜서입니다. 또 돈을 벌어야 하는 게 지겨워서 “그냥 시집이나 가 버릴까”를 이제는 이해하게 된 여자입니다. 저는 3년 동안 만난 두 살 어린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내면에 작은 열등감을 가졌지만, 자신의 상황을 나름대로 긍정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부드럽고 긍정적인 남자입니다. 학벌·돈·외모 그 어느 것도 따라주진 않아도 자신의 장점을 매우 잘 알고 어필할 줄 아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의 게으른 한량 기질이 절 지치고 불안하게 합니다. 정말 뜻밖으로 그는 소싯적부터 이렇다할 꿈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인생을 걸어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약해 보입니다. 날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이제 곧 서른을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공부하지만 딱 보아도 그렇게 해서는 영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의 열정을 쏟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큰 변화가 없습니다. 제가 그에 대한 이런 기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피차 이 문제로 스트레스받느니 헤어지는 게 나은지, 그도 아니면 그가 좀더 열정적으로 살도록 더욱 독려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A 돈 버는 게 지겹기도 하거니와 지루한 현실이 빙빙 도는 블랙홀 같아 숨막히지? 우린 여러 ‘획’을 그으며 여태 살아 왔잖아. 초등학교 들어가면 그 다음엔 중학교, 고등학교, 그 후엔 대학 혹은 취직. 삼사년 터울로 늘 새로운 미션을 해치우는 포만감이 있었지. 한데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하면서부턴 그 다음 단계가 좀처럼 안 나타나 아득하기만 했어. 그나마 회사원이면 만사 다 때려치고 싶을 때 꼭 희한하게 승진이라도 돼서 잠시 인생무상 잊으며 다시 파일 정리라도 하겠지만 당신은 프리랜서라니 그런 맛도 없을 거 아냐. 특히나 지금 일이 신통찮아 결혼이라는 새로운 획을 그으며 심기일전, 인생설계 좀 해 봐야겠다 싶은데 옆의 이 남자 영 의욕 없어 보이니 막막하지? 그럼 꿈과 열정이 있으면 괜찮은 남편감일까? 한데 그것도 과거를 돌이켜보면 참 오만가지였던 듯. “2년 내에 대리진급을 하고 25평짜리 전셋집을 마련하겠습니닷!” 벌겋게 술취해 외치던 박카스 청년을 잡는 게 현실적이었을까, “난 죽어도 타협만은 못해”라며 자기세계에 푹 빠진 한 아트하시던 그 분의 뮤즈가 되는 게 나았을까,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겠어!”라는 대의를 품다못해 여자친구 프티 부르주아 취급하는 혁명가에게 인생을 걸어야 했을까?(근데 지금 은행다녀) 아니면 남의 밑에선 죽어도 일 못 한다며 곧 죽어도 사업, 사업 노래부르던 그에게 적금 탈탈 털어 초기 투자금 보태줘야만 했을까? 거참 남자들의 꿈과 열정은 한없이 다양하더이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갑갑할수록, 그의 꿈이 크고 비현실적일수록, 그가 ‘꿈·미래·영원·우리’ 이 따위 단어들을 귓속에 조잘조잘 읊어댈수록, 왜 그리도 러브스토리는 드라마틱했는지. 열정이 넘치다 못해 고름 질질 터지는 이들을 몇 계절 겪어서인지, 나는 그대의 남자친구처럼 ‘현상유지X주제파악X호시탐탐’ 정도가 나름 담백하고 건전해 보이네! 하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꿈과 열정을 그가 추구해주는 것이겠지? 내가 고른 이 남자, 뭐 대단히 내세울 건 없어도 그래도 잘만 노력하면 꽤 쓸 만한 구석이 있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연인이 파악하고 있을 테니. 하지만 우리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사랑하는 상대에게 강하게 요구하는 부분은 종종 내게 그 부분이 없음을 방증하는 건데, 혹시 그거, 본인이 포기하려 하는 꿈과 열정을 그에게 과제로 던지는 건 아닌지 한 번만 리뷰 부탁해! 좀 살 만하다 싶으면 사람들에게 희희락락 관대하다가도 우린 숨통만 조여오면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 있는 익숙한 연인이나 가족에게 잔인해지고 혹독해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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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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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프리랜서ㅋ) 칼럼니스트 ※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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