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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17 18:38 수정 : 2010.02.20 17:03

둘째 가져야 후회 안 한다는데…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남의 기준’이란 상상의 산물, 강박은 자학을 낳고 자학은 불행을 만듭니다

Q 저는 30대 초반의 공무원직 여자이며 현재 8개월 된 딸을 돌보기 위해 육아휴직을 한 상태입니다. 저의 고민은 ‘둘째 문제’입니다. 요즘 들어 주변에서는 둘째를 가졌다는 소식이 많이 들리고 둘째는 언제 가지느냐는 질문도 종종 받습니다. 하지만 전 둘째 가질 생각이 없습니다. 입덧과 출산, 육아가 많이 힘들었습니다. 물론 아이를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도 있긴 했지만요. 그래도 둘째는 현재로선 낳고 싶지가 않습니다. 문제는 여태껏 저는 남들 하는 대로, 인생의 큰 결정을 해 온 터라 외둥이는 좋지 않으니 둘째를 낳아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제 주변에는 거의 자녀가 두 명이더군요). 그러니까 저는 주관이 약하고 귀가 얇아 남들의 말에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하기 싫은 일이라도 주변에서 권유하면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아가며 그렇게 했어요. 이게 하나의 삶의 패턴이 된 거죠. 늘 남들 하는 만큼 하려고 울먹이며 불평하며 한숨을 훅훅 내쉬며 사는 것. 둘째 출산도 하라면 다시 이 악물고 하겠지만 대신 내내 징징거릴 테지요. 또 그 아이들을 남들 하는 만큼 해 입히고 해 먹이느라 힘겨워 허덕이겠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런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행복하게 순간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근데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스스로 결정하는 게 매우 불안합니다. 혹시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내 몸만 편하려고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게 아닐까? 임경선님은 둘째가 있으신가요? 정말 형제 없이 외둥이로 크는 아이는 안 좋을까요?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면서라도 둘째를 낳아야 하는 걸까요?

A 하나 묻겠습니다. 그 ‘남들’이란 게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전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 아닐까 합니다. 예로 제 주변의 ‘남들’은 죄다 외둥이입니다. 내 환경 살짝 바꾸면 너무나 쉽게 ‘남들’의 실체도 바뀝니다. 달리 말해 명확한 실체가 없는, 임의적인 ‘남들’ 신경 쓰는 것 너무 무모합니다. 걔들이 또 언제부터 그리 내 인생에 관심이 있었다고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남들이 원하는 대로 참고 살면 점차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관이 생기지요. 난 이렇게 고통받고 손해 보면서 맞췄는데 왜 이걸로 충분치 않으냐 하며 더 부합하려 노력하는 아이러니. 그런데 그동안의 인고의 세월 속의 여러 고통스런 사건들을 한번 나열해 보십시오. 강압적인 엄마, 휘젓는 친구, 잘난 티브이 속 인물 등 여러 등장인물이 거쳐갔겠지만 공통적으로 한 사람이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요. 다름 아닌 나 자신. 원흉은 강요하거나 권유하거나 분위기를 조장한 ‘남들’보단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나 자신입니다.

꼭두각시 노릇은 잘하면서 스스로 결정하는 게 불안하고 미안한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그 계면쩍음을 만회하려는 듯 참 부지런합디다. 양자택일 선택의 기로에 서면 이들은 주로 ‘행동지향적’이 되지요. 어떤 선택을 할 때 안 해서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입장, 이게 훨씬 더 성실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사는 것처럼 비치고 ‘일단 난 할 만큼 했다’ 해서, 죄의식에서 사해질 것을 기대하니깐요. 그런데 놓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선택은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한다는 선택을 하는 것임을. 그것은 행동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이고 절대 ‘용기 없음’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닌 거죠. 일단 이 양쪽을 대등하게 인식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질 급한’ 행동파들이 있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니 늘 ‘쫓기는 느낌’이 들 수밖에요. 본인들은 합리적이라 그렇답니다. 지금 첫애가 8개월인데 진작에 둘째 고민을 하는 것도 고생할 것, 아예 한꺼번에 고생하자 식의 주변 얘기들이 한몫했겠죠? 미리 생각해서 미리 대비하고 미리 계획을 짜놓지 않으면 불안하기도 할 테고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니 적어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프로젝트는 깔끔하게 잘 해치워내야 될 테니깐요.

아아 이런 습성들의 체질화는 묘사하신 대로 ‘자학’ 캐릭터를 탄생시킵니다. 고통과 불안과 불행의 상태가 훨씬 더 익숙해져서 도리어 편안하고, 뭔가가 고통스럽고 괴롭고 힘들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내가 인생 제대로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한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항상 사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무의식적으로 애쓰게 됩니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그 상태가 되레 ‘정상’이니깐요. 고로 지금의 이런 상태로는 자식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애가 하나 있어도 불행할 것이고, 둘 있어도 불행할 것입니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정말 큰일입니다. 이제 겨우 초보맘 아닙니까. 이 바닥이 얼마나 험한 바닥인지 아십니까. 그간 ‘남들’ 얘기에 휘둘린 건 새 발의 피,입니다. 더 우스운 건 육아는 남들의 상식에 맞춰 내가 노력한다 해도, 애가 안 받쳐주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순수하고 ‘자의’로 충만한 놀라운 존재들이지요. 자, 이렇게 내가 잘해보려 했는데 잘 안되면 그 스트레스 어디로 갑니까. 멀쩡한 아이들한테 갑니다. 내 인생 통제도 모자라 이제 내 아이의 인생까지 통제해야 납득이 될지도 모릅니다. 강박은 자체 번식을 하니깐요. 그러니 참고 전혀 안 되는 저의 둘째 계획, 그리고 여타 주변 ‘남들의’ 둘째 계획 따위 묻지 마시고요(상담자뿐만 아니라 독자 분들 모두 제발!), 본인이 둘째 갖기 싫으면 걍 꼼꼼히 피임하세요, 네?

칼럼니스트 /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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