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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ee you 아니면 연애가 아니죠. 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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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제가 먼저 꾀었지만 시큰둥한 남자, 어느 선에서 놔줘야 할까요
Q 예, 처음부터 자백하겠습니다. 제가 그 남자를 먼저 유혹해서 사귀게 되었고 지금도 그 남자보다는 제가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보고 싶다고, 만나자고 전화하는 것은 늘 그 사람이 아니라 저예요. 그리고 한 달 전부터 그는 “나 지금 바빠”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를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이 올랐지만 저는 “아냐, 내가 미안해. 바쁠 때 전화해서. 내가 다시 전화할게”라면서 이해심 있는 여자인 척을 했습니다. 또한, 집착하는 여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최소 3일 간격은 두고 다시 연락했고요. 마음 같아서는 그의 회사나 집으로 훌쩍 찾아가 만나고 싶지만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봐 못하겠고, 그보다는 사실 그가 반겨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 때문이지요. 그리고 조금 전에 그에게 전화를 했더니 짜증나는 목소리로 “왜?”라고 다짜고짜 묻습니다. 점점 자주 못 보니, 이 연애, 끝이구나 싶었습니다. 그걸 모를 정도로 순진하진 않으니깐요. 또다시 저런 반응을 보이면 이젠 정말 이 남자 포기하자 싶었지만 자꾸 제 인내심의 한계선이 헐거워지는 거 있죠. 대체 저는 어느 선에서 이 남자를 놔줘야 할까요? 불씨는 아직 남아 있는 건가요? 그걸 알고 싶어(자학이죠) 이 남자를 긁게 됩니다. 그래 놓고서도 늘 ‘미안하다’고 말하는 저 자신이 슬픕니다.
A 밖에는 샛노란 개나리가 피었던데 옛날 생각에 저도 좀 슬프군요.
장면 1 | 그 남자 ㄱ은 ‘남는’ 시간만 저에게 할애했죠. 물론 처음엔 스케줄은 ‘맞는’ 게 아니라 ‘맞추는’ 거라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내려고 했지만 점점 저의 존재는 일→친구→운동→휴식 그다음 순위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말이라도 이쪽에서 ‘보고 싶다’고 하면 자기도 아쉬워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텐데. 원망스러운 마음은 태산이었지만 대신 저는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습니다. 남자한테 모든 걸 맞추는 나 자신을 한심해하면서도 그의 바쁜 일이 끝나는 날에 맞춰 냉장고에 맥주를 가득 채워놨던 것 같습니다. 이건 뭐 기다린다기보다 ‘주야 상시 대기’ 상태인 거죠. 하지만, 꼭 그런 날일수록 그는 애먼 시간에 불쑥 연락을 해왔습니다. ‘지금 나올래?’ 한강변을 질주하던 그 모범콜 번호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면 2 | “미안. 그날은 시간이 안 돼.” 그러고선 그 남자 ㄴ은 어색하게 침묵했습니다. 저는 미안하다는 소리도 그 침묵도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날이 안 되면 그럼 언제? 다음 약속을 안 해주는 그가 야속했습니다.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말해줘. 내가 고칠게’라는 말이 치밀어 올라왔지만 그 말을 했다간 그가 더 멀어질 거라는 걸 전 알아서 참았습니다. 그의 침묵 역시도 ‘우리 그냥 알아서 조용히 헤어지자’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깐요. 그런데 웬걸, 대신 엉뚱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우리 이제부터 그냥 친구로라도 만나면 안 될까?” 물론 친구 사이로 괜찮을 턱이 없습니다.
장면 3 | 어리바리했던 저도 이십대 후반쯤 되니 한 성깔 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내가 싫어졌어? 솔직히 말해봐, 끝내고 싶은 거야 뭐야? 남자라면 확실히 좀 해!” 여자가 화를 내니 남자는 변명을 하더군요. ㄷ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어렵사리 이었습니다. “아니 네가 싫어진 건 아닌데, 그냥 뭐랄까… 좀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달까.” 답답했지만 가뜩이나 성질 급한 제가 괜히 안 좋은 결론을 먼저 유도하는가 싶어 이쯤에서 꾹 참았습니다. ‘알았어.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그랬더니 그가 손사래를 치더군요. “아냐, 내가 먼저 전화할게!” 열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이롭게끔 상황을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어른 여자’였기에 그에게 충분히 시간을 줘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워워 성질을 잠재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연애 대신 일에 올인하며 석 달을 기다렸습니다. 그사이 그는 장가를 갔고 저는 승진을 했습니다.
여러 똑똑한 연애지침서들은 일침을 가합니다.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징징대지 말라고. “내가 중요해? 아님 일이 더 중요해?”라고 다그치지 않는 여자가 성숙한 여자라고. 그렇다면, 그 남자가 보고 싶어 터질 것 같은 이 마음은 대체 어떻게 ‘처리’하면 되는 걸까요? 보고 싶다는 마음을 보고 싶다고도 못하면 그게 무슨 연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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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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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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