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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4.14 22:25 수정 : 2010.04.17 12:56

‘노력’해야 한다면 ‘믿음’ 아니죠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남자친구의 한번 배신, 용서를 했는데도 왜 자꾸 의심이 들까요





Q 일년 좀 넘게 만난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주위 친구들과 어른들에게 건실한 이미지로 신뢰를 받는 사람이고요, 저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 믿음직한 사람이란 걸 알아요. 그런데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남자친구가 제 믿음을 깨고 바람을 피운 적이 있었습니다. 용서를 했고 이젠 상처도 아문 듯한데 그 기억에서 벗어나기가 참 힘이 드네요. 남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말이죠.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제가 문제인 것 같아요. 소심하고, 사람들을 너무 잘 믿어 곧잘 속고, 적지 않게 팔랑귀인 저는 조금만 미심쩍은 상황이 돼도 남자친구를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불어나는 상상과 의심을 하죠. 가장 힘든 건 다름 아닌 저 자신이더라고요. 처음 그때 빼곤 제 예감은 다 제가 만들어낸 애먼 상상들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남자친구를 못 믿는 내가 한심하고 이렇게도 믿음이 없는 내 사랑이 가벼워 보이고 이젠 오히려 제가 어떤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꼬투리 없나 찾는 사람 같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과거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긍정적으로 걸어가라 조언해서 마음 고쳐먹고 의지로 상대를 믿어보려 노력해봤지만 전혀 쉽지가 않네요. 이 사람과 함께 있는 한, 어쩌면 다른 누구라고 해도, 계속 믿음 없이 늘 불안에 흔들릴까 봐 두렵습니다. 저에게 따끔하게 뭐라고 해주세요.

A 사연을 읽으며 저는 계속 바닥에 깔린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에 대한 분노. 내게 상처를 줬는데도 그걸 용서하라고 허락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도 밉고 나도 밉고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요? 예, 용서 못 한 겁니다. 용서하고 싶었고 용서하려고 노력도 해보고 말로는 용서한다 했겠지만 결국 용서가 안 된 겁니다. 용서가 안 되니 자꾸 기억나서 사람 잡는 거죠. 과거에 남자친구가 믿음을 깨뜨렸을 때 초월한 척 용서했던 것의 부작용인 셈입니다.

‘여자가 너무 과민반응 하는 것 아니냐. 여자의 자신감 부족으로 인한 의부증 아니냐’, 언뜻 보면 이렇게 풀어봄직한 사연인 게 함정입니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피곤한 성격, 그래 봤자 본인한테 해로우니까 남자 잘못 운운하기 전에 본인부터 좀 고치는 게 신상에 이로울걸’, ‘아우 답답해.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그러냐. 남자들이 원래 좀 그런 거 몰랐냐’, ‘걍 넘겨, 아님 너도 한 번 나중에 바람피우든가’,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래도 현실적으로 보면 남자 버리긴 아깝다’ 이런 얘기를 그간 많이 들어왔기에 더 고민이 되었겠지요. 그게 참, 자기 감정이 확실히 안 보일 때에, ‘객관적 시선’들이 개입하게 되면 나의 정직한 입장이나 내 머리로 내린 해답은 희미해지더라고요.

하지만 ‘믿음과 배신’의 중요도는 개개인마다 엄연히 다릅니다. 뒤끝 작렬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찜찜한 것,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누군가의 척도로 ‘그 정도라면 용서해줘야 할 일’이라고 간단히 처리하고 넘길 순 없습니다. 인간관계의 가치를 평가할 때 그 우선순위에서 믿음과 신의가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다면 그것은 존중되어야만 하겠지요. 내가 아니라면 누가 뭐래도 아닌 겁니다.

따라서 문제는 현재의 의부증 증세나 자기확신의 부족함이 아니라 그가 처음 믿음을 깼을 때 자신의 가치 기준상으로는 용서가 절대 안 돼 그때 끝냈어야 하는 것을 당시 여러 가지 이유(주변 사람들은 그를 좋게 보니까, 다른 부분은 다 괜찮으니까, 혼자가 되기 싫어서 등)로 환부를 숨겨온 점입니다. 사실상 용서하진 못했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이처럼 관계를 지속시키니 환부는 더 곪고 내 마음은 지옥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가 깊이 상처 입힌 부분 그대로의 고름 덩어리를 끌어안고서 교제를 계속하니 뭔 일이 있을 때마다 옛날의 아팠던 생각이 나서 당연히 끙끙 앓을 수밖에요.

물론 아름답게 잘 어울리는 보기 좋은 커플이, 객관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사소해 보이는 문제로 이별을 고려하고 있다면 주변 사람들은 좋은 마음에서 곧잘 안타까워하며 조언해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선의’를 가지고 좋게 좋게 잘 소통해서 서로의 실수를 사랑으로 잘 ‘극복’하라고 용기를 주곤 하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선의도 때로는 참 난감한 것입니다. 타인들이 주는 ‘나의 속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제공하는 선의’는 나의 에너지를 앗아가고 무력화시키거든요. 허나 타인의 선의를 필요 없다고 마다하는 건 타인의 악의와 싸우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니 무력화된 사람의 가슴속엔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저 깊숙한 곳에 소리 없이 자리잡게 되고 외적으로 분출되기 전까지는 어느덧 그 분노는 나 자신을 향해 치달아 결국 들들 저만 들볶습니다. 그 어떤 이유건 나를 자학하게 만드는 사랑은 굳이 뭘. 때로는 내가 미친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그리고 ‘배신’ 문제요, 그거 의외로 명료한 이슈입니다. 용서하든 헤어지든 그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것을 아주 정확히 집어주지요. 사랑은 상대의 있는 그대로의 못미더운 모든 것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것. 용서하고 싶진 않았지만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면 사랑하는 것이니, 순간의 분노로 헤어지지 않는 편이 낫겠죠. 한편, 용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용서가 안 되었다면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용서는 개인의 아량 문제가 아니라 애정 문제라는 거예요. 믿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면 그건 이미 믿음이 아닌 겁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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