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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12 16:51 수정 : 2010.05.16 09:48

도망가지도 맞짱뜨지도 말라.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전형적인 마초 돌아이 타입의 ‘갑’에게 딱 걸렸습니다





Q 저는 회사 5년차 대리입니다. 터프한 업계이지요. 저희 회사가 다른 기업에 인수되어 자회사가 되었는데 덕분에 ‘을’이 되었습니다. 바뀐 분위기에 좀 당황스러워하고 있던 차, 최근에 제가 ‘갑’인 기업이 준 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갑인 이 대기업은 회사 내부 분위기는 군대, 남성문화가 아주 심합니다. 담당자를 만나러 갔더니 전형적인 마초 돌아이 타입이었습니다. 이 담당자가 돌아이로 명성이 좀 자자했는데 그래서 제발 안 걸렸으면~ 하다가 이번에 딱 걸린 거죠.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끈적한 말투를 쓰는 것도 충분히 기분 나빴는데, 더한 것은 최소 넉달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한달 만에 끝내라고 다짜고짜 엄포입니다. 어떤 이유나 변명도 통하지 않고 ‘하라면 해’라는 식이더군요. 정말 답답했습니다. 같이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도 대리급이라 제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없고 저희 부서 부장님도 이 ‘갑’을 싫어해서 웬만하면 피하려 하세요. 프로젝트는 철저히 담당자 책임이라며 상부에선 별로 해줄 수 있는 일도 없는 거 같습니다. 오히려 ‘××씨는 그래도 여자니까 조금은 더 잘해줄 거야’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고요. 이런 분위기가 힘들어 이직을 준비하려는데 쉽진 않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A 아아, 추억의 마초 돌아이. 꼭 있죠, 모두가 슬슬 피해가는 ‘미친개’ 타입. 독선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정치꾼 타입. 그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높게 평가하고 그게 자신이 일을 배워온 방식이라 합니다. 무례하고 강압적인 행동은 업무를 원활히 하기 위해 충분히 정당화되며 그 과정에서 상대를 짓밟고 상처 입히는 것 따윈 신경 안 씁니다. 종종 이 방식이 먹혔던 거죠.

그런 미친개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다름 아닌 희생자들의 당황하고 위축된 반응이었습니다. 비즈니스맨의 상식이 안 통하는 난봉꾼에게 인격을 유린당하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힘을 잃고 급격한 공황상태에 빠지는데, 그들은 상대의 이런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심리를 이용하는 거지요. 희생자들은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화를 내거나 무서워하거나. 정의의 이름으로 울분을 못 참고 터뜨리면? 미친개는 더 자극되어 돌진합니다. 보신을 위해 뒷걸음질하면? ‘도망간다’며 그 나약함을 비난하지요. 명성이 자자한 업계의 그분 앞에 여자 대리를 굳이 배치시킨 ‘을’회사의 꼼수는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여자라면 남자처럼 자존심 가지고 발끈할 일이 덜할 것 같고, 여성 특유(?)의 책임감과 참을성으로 어찌되었든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해주지 않을까 싶고, 여자라면 ‘좀더 잘해준다’기보다 ‘조금은 봐주겠지’라는 발상이 작용했겠지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쯧.

어찌되었든, 그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나올까 유심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간 자신의 언동에 사람들이 취해온 반응들을 익히 아니까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그의 예상을 뒤엎어주세요. 그가 나를 공격한다 해도 뒷걸음질치지 말고, 반대로 그를 굴복시키려고 나서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갑’들의 ‘하라면 해’는 그들의 ‘클리셰’일 뿐입니다. 특히나 한창 일 욕심 있을 당신의 연차나 캐릭터를 간파했다면 이 정도 압박은 심지어 동기부여 엔진이라고 확신하고 있겠죠. 겁먹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지만 한달 안에 끝내는 것은 이런저런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상황에 대한 정보와 자체분석을 정확히, 흔들림 없이 표현하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면 됩니다. 권위적인 상대의 명령을 직접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나의 생각’을 알리는 표현방식을 빨리 터득하십시오. 그는 ‘강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라, ‘쉽지만은 않은 여자’의 느낌을 세련되게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상대는 마초라 여자를 위협적인 경쟁상대로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대들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자기주장을 펴면 ‘여자지만 참 줏대 있군’ 이러면서 마치 자신이 대인배가 된 양 우쭐해할지도 모릅니다. 이참에 꼰대 마초들의 심플한 지(G)스팟을 어서 간파하십시오. 향후 직장생활에 쓸모 많습니다.

그리고 정의감으로 무장한 수많은 이 땅의 5년 차 대리들에겐 미안하지만 미친개와는 웬만하면 맞짱 뜨지 마십시오. 왜냐, 당신이 다치니까. 상대는 싸움의 달인이자 사내정치 바닥의 닳고 닳은 ‘선수’이며 미움 받는 것으로 엔도르핀이 돋는 괴물입니다. 괜히 감정적으로 울컥했다간 그의 게임에 말려드는 것은 물론이요, 그와의 관계가 더욱더 불쾌해지니 더 이상 효과적인 대처가 불가능해져 결국 중이 절을 떠나는 수밖엔 없어집니다. 특히나 갑을관계라면 당장 갑을 굴복시킨 만족감을 담보로 어느덧 밤잠을 못 이루게 됩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숲 속에서 곰을 만나도 냉정을 유지하면 산다고 했습니다. 태생이 미친개라 행동패턴 예측이 힘들진 몰라도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애쓰십시오. 또한 나를 최대한 심리적 중립상태에 두고, 의연하게 내 의견을 피력하며 차분히 일을 진행해 가십시오. 더불어 발뺌하려는 상사들에겐 돌아가는 상황을 더욱 꼼꼼히 보고하십시오. 5년차 대리 시절엔 나 혼자 가녀린 어깨로 회사의 무게를 짊어지는 듯하지만(그리고 이 심리를 주변에서 참 잘도 이용해먹지만) 보이진 않아도 누군가는 자전거 뒤꽁무니를 여차하면 잡아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조직이라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한달 안에 프로젝트 못 끝냈다고요? 프로젝트 제때 끝난 거 전 본 적이 없습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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