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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소린 아니지만 선입견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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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돈을 적게 벌더라도 만족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요 저는 21살의 대학생입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돈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인생에서 최우선시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돈을 아주 많이 주더라도 너무 일을 심하게 시키는 회사라면 그 회사가 결코 좋은 직장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한 경영컨설턴트의 강연에서 모 기업의 평균연봉 수준은 한국 대기업 중 상위 30위권에 들지 못하지만, 그 기업의 직원 만족도는 1위였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전 이런 직장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나의 생각이 내가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절약하는 성격이든 아니든, 결국에는 제가 어려움 없이 자랐기 때문에 돈을 그렇게까지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 않고 ‘돈을 아주 많이 벌 수 있는 직장보다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내가 좀더 만족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요? A ‘돈을 아주 많이 벌 수 있는 직장보다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내가 더 만족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는 아니지만 ‘선입견’이 들어간 소리입니다. 일단, 돈을 잘 벌면서도 일하면서 행복해하고 만족하는 사람,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연봉이 높은 회사에 가면 소중한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것, 연봉을 많이 주는 회사는 뭔가 그만큼 비인간적으로 직원들을 추악하게 부릴 거라는 것, 고속승진을 하고 고액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부패한 수단으로 그런 자리에 올랐을 거라는 것, 다 선입견입니다. 이것은 가령 사회정치가 난무하고 이기주의가 팽배한 대기업보다 가족처럼 단란한 소규모 회사에서 더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인데 말이 좋아 가족이지 그 가족구성원과 안 맞으면 정말 도망갈 구석 하나 없는 생지옥입니다. 또한 이것은 마치 부자인 남자친구를 사귀면 왠지 내가 속물 같고 가난한 백수남자와 오랜 사랑을 지켜내면 순애보로 미화하게 되는 논리입니다. 연봉을 많이 주는 회사는 단지 좀더 들어가기 어려울 뿐이고 부자인 남자친구와 사귀기는 좀더 어려울 뿐인 문제인데. 무리도 아닙니다. 매스컴은 우리에게 이런 ‘조화로운’ 이야기를 많이 해주니깐요. ‘세상은 꼭 그리 살벌하지만은 않다’고 내세우는 모든 소식들은 반대로 말하면 세상이 얼마나 살벌한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건데요, ‘세상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발 빠른(?) 소식에 우리는 곧잘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믿음 역시 우리의 귀를 간질이는 널리 퍼진 믿음인데요, 회사는 단순히 돈을 버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하고, 자아발견, 자아성취를 하며 인간답게 나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답니다. 대학의 피아르(PR)광고가 그러하듯(아시잖아요) 기업의 피아르광고도 뭐 일단 들어가서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시장조사 결과에 나온 결론과 수치도 의심해 봐야지요. 바로 당신이 그 심리만족도 1위 회사의 평균치를 낮춘 가장 불행한 장본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난 그렇다면 차라리 평균적으로 불행한 회사에서 상대적으로 행복한 직원으로서 회사 다니는 게 훨씬 다닐 맛 난다고 보는데요. 우리가 무엇을 인생의 가치로 해석하고 무엇을 ‘없어도 되는 것’으로 결정하는지는 우리 개개인의 자유입니다. 저도 좀 그런 편이지만, 물욕이 없다는 것은, 삶을 다른 측면에서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괜찮은 개인적 자질이라고 인정해요. 하지만 이게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에 반영이 되는 건 좀. 심지어 믿음과 사랑이라는 선량한 가치 하에 아이를 맡긴 엄마와 ‘이모님’ 사이부터도 고용-피고용 관계의 태생적인 갈등이 생깁니다. 월급 협상에서 관계가 시작되지만 어느덧 피고용자가 경제적 욕구를 넘어 자아존중감이나 재미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구를 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지요. 친정엄마처럼 내정간섭을 하질 않나, 아기 콧바람 쐐야 한다고 개인적 외출을 합니다. 고용자가 보다 못해 제재를 가할 때 피고용자는 두 개의 가치 중 어느 한쪽을 불가피하게 선택해야만 하고, 이때 그는 또다시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양보하게 됩니다. 양자의 ‘효율’을 따지는 논리가 이기는 거지요. 물론 훌륭한 기업에는 이 두 가지 욕구가 적절히 공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만족감’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불안한 성질을 지닌 것이기에, 그리고 그 만족감은 타의적으로 제공되기보다 스스로 찾아 취해야 함을 깨닫기에, 피고용자들은 대신 회사한테는 변치 않는(혹은 안정적으로 상승하는) 연봉액수만을 ‘믿을 구석’으로 여기게 됩니다. 어때요, 슬픈가요? 슬프지만 현실적인 얘기입니다. 되레 이상적인 일터 찾아 취업했을 때 겪는 현실의 낭패감 때문에 그 후로 계속 ‘유토피아 찾는 철새’ 될까 봐 전 더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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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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