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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세 선수(왼쪽)는 K리그 올스타팀과의 조모컵 경기에서 여러 차례 슈팅을 날렸지만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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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멋쟁이 정대세의 즐거운 프리킥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자연 속 치유여행을 다녀온 뒤 전투준비 완료!
안녕하세요, 정대세입니다.
지난번 칼럼에 이어, 축구에서 호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칼럼도 파워풀하게 써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름휴가를 어떻게들 즐기고 계십니까? 저는 8월 들어 두 가지 귀중한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제이(J)리그와 케이(K)리그 올스타들이 겨룬 조모(JOMO)컵. 또 하나는 짧은 휴가를 이용해 치유여행을 다녀온 것입니다. 둘 다 모두 제게는 최고의 추억을 안겨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빨리 전해드리고 싶어선지 펜이 술술 잘 나갑니다.
K리그 올스타, 기합이 들어가 있더라
텔레비전으로 보신 분도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역시 먼저 조모컵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실제로 시합을 끝내고 느꼈습니다만, 축구선수로서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프로축구 선수라고 해서 누구나 다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포워드(FW)라는 포지션으로 출장하는 건, 실력은 물론이고 운도 필요합니다. 더욱이 올리베이라 감독이 제이리그의 수많은 포워드진 중에서 아직 미덥지 못한 기술과 근성만으로 볼을 쫓아다니는 저를, 단 3명만 뽑는 대표 포워드의 한 사람으로 선택해주신 데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소(초등)학생 무렵부터 오로지 조선대표만을 목표로 축구를 해왔습니다만, 일본에서 사는 이상 티브이로나 잡지로나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제이리그였습니다. 1993년 5월15일 제이리그가 화려하게 개막했을 때 저는 키도 작고 빼빼 마른데다 새까맣게 탄, 제이리그를 동경하던 소학생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나고야 그람파스의 붉은 유니폼, 서포터로 초만원인 녹색 잔디 스타디움이 떠오릅니다. 경기를 보러 갈 때마다 제이리그 유니폼을 부모님한테 사달라고 졸라서는 거기에 붙어 있는 ‘J’라는 기장을 보며 언젠가는 저도 꼭 그것을 붙이고 축구를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8월2일은 그토록 동경했던 제이리그 팀에서 플레이를 하면서, 마침내 제이리그 대표로서 국립경기장에 서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개무량했습니다. 실제로 뽑혔다는 얘길 듣고도 둔감하여 그땐 잘 몰랐는데, 시합 전날 공식연습 때에야 비로소 생생하게 실감했습니다. 일본대표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면면들 중에서 저는 태연을 가장하며 평소보다 더 당당한 태도를 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은 스타팅 멤버로 뽑혔고 게다가 현역 한국대표 주장인 미더필더(MF) 김남일 형과 함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돼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케이리그 올스타는 경기 사흘 전부터 전체 연습을 할 정도로 기합이 들어간 분위기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영원한 라이벌을 만나니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겠지요. 시합 전에 케이리그 올스타의 통역으로 동행한 지인을 통해서도 상당히 기합이 들어가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틀림없이 해볼 만한 좋은 경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기 당일 여러 번 찬스가 있었건만 제 슈팅은 골로 연결되지 않고 계속 빗나갔습니다. 여러 매체들이 결정력 있는 포워드로 저를 소개해준 걸 생각하면 용서라도 구하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축구라는 스포츠는 골을 내야 할 때 내지 못한 팀에겐 반드시 반동이 돌아옵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전개됐습니다. 전반 종반에 1점을 내주었으나 후반전에는 페널티킥 찬스를 얻어 단숨에 동점을 만드나 했는데 또 실축. 그 뒤 연거푸 2점을 먹고 투리오(브라질 이민3세로 우라와 소속) 선수가 1점을 만회했으나 이미 따라붙기엔 늦어 그 상황 그대로 종료 휘슬이 울렸습니다. 결과는 3 대 1 참패였습니다. 아무리 공식전이 아니었다고 해도 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자신의 무기력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년에는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데, 다시 선발될 수 있기를 빌면서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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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일 밤에 열린 조모컵 전야제 행사에 참석한 정대세(앞줄 왼쪽서 두번째)선수. 정대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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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정대세의 즐거운 프리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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