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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3대 테너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신영조 한양대 교수는 어려운 형편을 이겨내고 성악가로 성공한 집념의 음악가다. 야구선수에서 성악도로 변신한 그는 40여년 동안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하며 음악 한 길을 걸어왔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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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뇌경색 물리치고 돌아온 테너 신영조
고1까지 야구선수…백인천과 중학 동기악써도 소리 안나 대학땐 음악 포기할뻔
병마로 ‘어눌한 발음’ 됐지만 보란듯 재기
목소리처럼 탁 트인 깨달음 “좌절 마세요” 어눌한 말투가 처음엔 귀에 걸렸다. 성악가에게 어색한 발음은 치명적일 것이다. 하지만 테너 신영조(66) 교수에겐 7전8기의 증거다. 뇌경색을 이기고 무대로 돌아온 훈장이다. 그와 마주하자 극적인 성공담에 대한 기자 특유의 기대가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그에게도, 삶은 좌절과 극복의 연속이었고 성공은 그 과정 속에서 잔잔히 모습을 드러내온 것이었다. 국내 3대 테너로 꼽히는 신 교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 많은 음악계에서 가난과 병마를 이겨내고 맨손으로 국내 최고의 성악가가 된 이로 유명하다. 45년 성악가의 길을 걸어온 그가 지난 2월 34년 동안 재직한 한양대 음대에서 정년을 맞았다. 새학기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한 서울 한양대 교정에서 그를 만났다. -정년 퇴임하셨는데도 굉장히 바빠 보이십니다. “아직도 일주일에 다섯 시간은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음대는 다른 단과대와 달라서 실기는 일대일 수업이고 저하고 공부한 친구들은 졸업까지 책임지고 가르쳐야 해요. 그래도 많이 여유로워지긴 했어요. 한참 아이들 가르칠 때는 매일 강의하느라 내 연주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성악가 신영조라는 이름에선 어려움을 극복한 일화가 먼저 떠오릅니다. 야구선수였다가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젊은 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제가 중앙중학에 입학할 때 던지기 시험에서 왼손 일등을 했어요.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생활이 어려웠는데 체육 선생님이 야구를 하면 장학금을 준다고 권하셨어요. 전 야구가 싫었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서 야구를 했고 장충고에 야구부가 생겨서 잘하지는 못했지만 스카우트됐어요. 경동고 출신 백인천씨가 우리 중학교 동기인데 계속했으면 같이 야구했겠지요.” -어떻게 성악으로 방향을 바꾼 건가요? “고1 때 (야구를) 너무 하다 보니까 팔이 빠져버렸어요. 그냥 빠진 게 아니고 심각해서 깁스하고 병원에 한달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라디오에 심야 클래식 프로가 있었어요. 완전 문외한인데도 어린 나이에 좌절을 겪고 있다 보니 음악에 매료가 됐죠. 사실은 작곡을 하고 싶었어요. 음악 선생님한테 찾아가니까 물끄러미 보시면서 ‘저기 피아노에 가서 도를 한번 눌러봐라’ 그러더라고. 그런데 도가 어딨는지 알아야지. 허허.” 당시 음악 교사는 그에게 “작곡하려면 피아노는 몇 년 쳐야 하니 안 되겠고 노래를 해봐라”고 권했다. 새 희망이 생긴 신 교수는 노래의 꿈을 키운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에다가 가족들이 완강하게 반대했다. “음악 하면 밥이나 먹을 수 있느냐는 거였죠. 그것도 남자가. 의대를 가거나 교사를 하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데…. 더구나 시골 출신인 저희 부모님들은 아주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5형제 중 장남인 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구를 그만둔 뒤 음악에 매달렸다. 개인 교습비도 없고 피아노도 따로 없어 교회에 다니면서 혼자 연습했다. 그리고 결국 한양대 음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음대에 진학한 뒤 더 큰 시련을 만난다. “입학해서는 정말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그런데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니까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았어요. 음악을 못하겠다 싶어 군대 다녀와서 진로를 바꾸기로 했어요.” -그렇게 원하던 음악의 길을 걷게 된 건데요? “소리가 안 났어요.” 당시의 절망이 떠오르는 듯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학에 와 보니까 나보다 너무 잘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음악 하지 않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될 텐데, 나이에 맞춰서 소리가 어디까지 나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런데 고음도 안 나오고 아리아도 부를 수가 없는 거예요. 테너면 기본적으로 에이(A)음이 나와야 하는데 아무리 악을 써도 이게 안 나. 후배들은 너무너무 잘하고. 그래서 아, 난 역시 안 되는구나, 그랬죠.” 그는 음악의 꿈을 접고 입대한다. 성악가에겐 금기인 담배도 입에 댔고, 제대 뒤 농대나 법대로 편입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군 생활 말년에 뜻밖의 일이 생겼다. “소리내기는 잊어버리려고 의식적으로 줄담배를 피우면서 2년여를 제대 뒤 계획만 세웠어요. 제가 전방에서 근무했는데 그때는 간첩이 많이 넘어오고 그러던 때였어요. 하루는 혼자 보초를 서는데, 가만히 노래를 불러 봤어. 그런데 예전엔 안 나오던 소리가 나오는 거야. 에이음도 나오고, 비플랫(B#)도 나오고 하이 시(C)도 나오는 거예요.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는데, 누가 뒤에서 총부리를 딱 갖다 대는 거야. ‘아 간첩이구나, 이제 소리가 나오는데 죽게 생겼구나’ 했죠. 그런데 우리 중대장이었어요. 그날따라 임시근무를 하던 중대장이 노랫소리가 들리니까 조용히 올라온 거였지. 중대장이 ‘너 음대를 나왔는데 군대를 왜 이렇게 전방으로 왔냐. 내가 노래 부를 수 있게 소원 들어줄게 말해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대 6개월 정도 남겨두고 레슨 받게 외박을 좀 허락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일요일마다 노래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안 갔으면 노래를 못 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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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경색 물리치고 돌아온 테너 신영조(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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