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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의 인생은 현대사 그 자체이자 고난의 연속이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살다가 관동군에 끌려가 소련 시베리아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다시 중국에 돌아온 그는 의사가 되었지만 문화혁명 때 일본 부역자로 몰려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이후 교수가 된 뒤 일본을 상대로 하는 보상 운동에 헌신했던 그는 한반도의 통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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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
태평양전쟁 일본군 징집 4일만에총알 세 개 박혀 시베리아로…
추위·중노동 속에 넘나들던 사선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140㎞ 떨어진 바오딩(보정)에 허베이대학교가 있다. 학교의 전신은 1920년 프랑스 가톨릭수도회인 예수회가 텐진에 세운 톈진공상대학이다. 1970년 이곳으로 교사가 이전됐다. 허베이대학교 인근에 교직원들 대상으로 분양한 주택단지에 한 조선족 은퇴 교수가 살고 있다. 1925년생이니 올해 84살의 고령이다. 죽을 고비를 세 차례 넘겼다고 스스로 말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소련군과의 전투 때, 시베리아에서 포로로 강제사역을 하던 때, 그리고 문화혁명 때라고 한다.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은 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를 지난 12일 자택에서 만났다. 시베리아 억류 경험자 가운데 북한을 거쳐 중국 동북3성으로 돌아간 동포들의 삶을 듣기 위해서였다. -고향이 두만강변인 함북 종성군 풍곡면으로 되어 있던데요. “거기는 아버지의 고향이고 나는 간도성 석현에서 조금 들어간 신제촌이란 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새로 만든 마을이라는 뜻인데 조선인 부락이었지요.” -자라면서 항일 게릴라 움직임을 듣거나 본 적이 있나요? “아버지나 사촌형은 직접 겪었습니다. 신제촌에 항일 빨치산들이 나타나 어떻게 알았는지 친일분자들의 집에 방화를 하고 일부는 끌고 가 처단을 하는 일이 드물게 있었지요.” 그는 간도 용정에서 중학교 과정인 광명국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총리 국회의장을 지낸 정일권,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 시인 윤동주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만주국의 신경사관학교를 나온 정일권은 일제 때 길림헌병대 대장을 했다. -45년 징병 2기생으로 관동군에 끌려가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일본대학에 들어가려고 도쿄에 갔는데 만주의 공립중학교 졸업자는 아예 시험자격조차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도쿄의 치산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전황이 악화되자 돌아오라는 연락이 집에서 왔습니다. 간도로 돌아가 1년쯤 집안일을 돕다가 45년 8월10일까지 북만주 하이라얼의 515부대에 입영하라는 영장이 나왔습니다.” -그날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한 다음날인데 실전을 겪었습니까? “조선인 입대자들을 태운 기차가 하이라얼역에 도착하자마자 소련 전투기가 공습을 해왔어요. 부대에 도착해 조선인 신병 3백명과 일본 예비역 1백명을 합쳐 1개 대대가 급히 편성됐지만, 소련군의 공격이 격화되자 막사에 불을 지르고 후퇴를 거듭했지요. 조선인 신병에게는 총 같은 기본무기조차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8월14일 소련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나는 세 군데나 총상을 입었어요.” 그는 왼쪽 귀를 보라고 가리켰다. 총알이 스치고 지나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맹관총상’이라는 낯선 말도 썼다. 관통총상의 반대어인데 넓적다리에 총알이 그대로 박혔다고 한다. 일제의 국책회사였던 남만주철도(만철)의 건물에 임시수용돼 소련군 위생병의 응급치료를 받았다. 건물 안에 책이 많이 쌓여 있어 들쳐보다가, 도쿄외국어대 교수가 쓴 러시아어 독본을 발견했다. 소련이 일본에 이겼으니, 러시아말을 배워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혼자서 한두 마디씩 연습을 했다. 그는 시베리아 치타의 육군병원으로 후송돼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자 인근의 수용소로 옮겨져 다른 일본인 포로들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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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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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일본군 경력에 ‘반동’ 몰려
악몽의 세월은 너무나 길었다 -어떤 진료활동을 했나요? “국무원 중앙부처의 하나인 야금부 산하 지질조사대에 의사로 배치됐지요. 중국에서 모든 진료는 무료이니까 의사로서 고충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이 일을 하기 싫으면 위생소(의무실)에 와서 담배 피우고 한두 시간 쉬다가 갑니다. 때로는 본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약까지 요구하며 의사를 폭행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보고 약을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페니실린 마이실린 등의 약을 달라고 하니 말싸움이 벌어지지요. 승급을 할 때 지도자의 평가와 군중의 의견을 반영해 결정하므로 원칙대로 하는 의사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60년대 문화혁명기에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하던데요. “65년 지린성 훙치링 니켈광산의 위생소로 전속되고 1년쯤 뒤 문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기존의 관리체계가 붕괴되고 홍위병들이 반동과 투쟁한다며 모든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했지요. 나는 일제 때 관동군에 끌려갔는데도, 중국 인민의 적인 일본 군대에 들어갔다고 심한 추궁을 당했습니다. 긴 종이를 주고 스스로 죄명을 쓰라고 다그치지요. 도대체 무슨 죄를 졌냐고 항변하면 관동군 병사를 하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결국 ‘일본 관동군 사상반동분자’ 라고 썼지요. 60년대 초기 동북3성에 대기근이 들어서 조선족들이 식량을 구하지 못해 몰래 북조선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 나도 북조선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당 조직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는데 그것도 화근이 됐지요. 사회주의 조국을 배신하려 했다는 거지요. 중국과 소련 사이에 이념논쟁이 격화되면서 중국과 북조선의 관계가 악화됐을 때입니다. 관동군 사상반동분자라고 쓴 종이를 붙인 큰 널빤지를 목에 걸고 반나절 동안 광장에 서 있게 하거나 거리를 끌고 다니며 두드려패니 견딜 수 있나요. 몇 차례나 빈사 상태가 됐습니다. 그런 사태가 2~3개월 지속되다가 인민해방군이 질서 유지를 위해 개입하면서 악몽이 끝났지요.” -일제 때 징병으로 끌려간 동포가 무수히 많았을 텐데 다른 조선족도 심하게 당했나요?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일본군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다 아니까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외딴 산골에서 근무하다보니 곤욕을 치른 것 같아요.” -의사로 쭉 재직을 하다가 어떻게 일본어 교수가 됐습니까? “1년 내내 오지나 산골에서 근무를 하다보니 자식 공부 시키는 게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우연히 신문에서 허베이대학이 일본어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습니다. 지질조사대 지도부에 시험 치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졸랐지요. 수십년 동안 일본어를 쓰지 않았는데도 1등을 했습니다. 81년 허베이대학에 자리를 얻어 처음 서너 달은 러시아어를 가르치다가 일본어 담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대학으로 옮겼기 때문에 몇 년 후 부교수로 퇴직했지요.” -한국의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조선은 하나로 통일돼야 합니다. 절대로 둘이 될 수 없습니다. 북조선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생활이 빈한한 사람을 깔보면 안 됩니다.” 바오딩/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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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잡지 <후센>(부전) 198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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