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
[열려라 경제]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세계은행은 최근 신종 인플루엔자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최대 3조달러(약 4000조원), 즉 세계 총생산의 5%가 될 수 있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몇 년 전 ‘사스’로 인해 경제성장률이 떨어졌듯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중국이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을 금지하고 나섰고, 세계 무역과 인구 이동의 축소가 걱정된다. 그렇게 되면 유달리 수출 의존적인 한국경제는 다른 나라보다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전염병이 인류에 재앙을 가져온 역사적 사례는 많지만 1347년부터 5년간 유럽을 휩쓴 흑사병(black death)만큼 참혹했던 것은 없다. 이 병은 중국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발병한 뒤 무역 경로를 따라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후 분석에 의하면 쥐벼룩을 통한 전염병인데, 당시로서는 병의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사망자 추정치가 적게는 2500만명, 많게는 7500만명이다.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혹은 절반이 죽었으니 중세 유럽은 흑사병으로 초토화됐다고 말해도 좋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을 ‘떼죽음’(big death)이라고 불렀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흑사병에 직면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다루었듯이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괴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기독교는 권위가 실추됐고, 이성을 잃은 군중은 괜히 유대인, 거지, 나병환자를 의심해서 수천명을 화형에 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덧없는 인생에 절망하여 순간적 쾌락주의도 만연했다. 흑사병의 피해가 컸던 이탈리아에서 보카치오는 <데카메론>(1353)을 썼는데, 이것은 피렌체에서 흑사병을 피해 시골에 온 10명의 젊은 남녀가 주고받는 이야기로 꾸민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보카치오는 흑사병으로 피렌체에서만도 10만명이 죽었다고 썼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격감은 당시 유럽의 부족한 식량과 과잉 인구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묘한 해석이 나왔다. 이는 18세기 말 영국의 목사이자 경제학자였던 토머스 맬서스가 쓴 <인구론>에 입각한 해석이다. 맬서스는 목사답게 인간의 성욕이 억제 불능인 것을 한탄하면서 인구는 기하급수로, 식량은 산술급수로 늘기 때문에 양자의 불균형은 불가피하고, 결국 간헐적인 전염병이나 전쟁 같은 대재앙을 통해서만이 불균형이 해소된다는 우울한 결론을 내렸다. 이런 비관적 진단을 보고 경제학에 ‘우울한 과학’이란 별명을 붙여준 사람은 19세기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칼라일이었다. 흑사병 이후에도 대형 전염병은 18세기까지 끊임없이 나타나 인류를 괴롭혔지만 19세기 이후에는 의술과 과학의 발달로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문명이 개화한 21세기에 온갖 괴질이 난무하니 이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자연의 경고가 아닌지.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