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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10 19:57 수정 : 2008.10.13 16:44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의역설

1797년 11월 정조는 희한한 명을 내렸다. ‘비뚤고 뾰족한’ 글씨체로 된 과거 답안지는 무조건 불합격시키라는 것이었다. 이미 정조는 젊은 선비들이 애호하는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문체, 즉 소품의 금지를 명한 터였다. 하지만 글씨체까지 다스리라는 새로운 조처는 과민반응에 가까웠다. 물론 거기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강이천과 같이 소품을 탐닉하던 일부 불량 선비들이 조선이 곧 멸망할 거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비밀리에 작당했고, 정조는 그런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강이천은 시서화 삼절(三絶)로 손꼽힌 강세황의 손자였다. 12살 때 정조 앞에 불려가 시를 지을 정도로 글재주가 탁월했다. 그는 19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선비였다. 그런 그가 천주교를 믿게 되면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정감록>이 예언한 진인(眞人)으로 간주해 새 세상을 건설할 꿈에 부풀었으니, 변고라면 큰 변고였다.

정조가 문체나 글씨체 자체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강이천처럼 뛰어난 선비들이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갈망 때문에 불온한 상상력을 펼치며 성리학을 배신하는 것이 문제였다. 왕은 태연한 척했으나 내심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누구라도 소품에 빠지면 천주교를 믿게 되고 결국은 <정감록> 같은 황당한 예언에 빠져 역모를 꾀하게 되리라는 염려였다. 결국 왕은 젊은 선비들이 꿈꾸던 이상 사회의 싹을 없애기로 작정해 문체는 물론 글씨체까지 탄압했다.

강이천과 정조는 동시대 인물이지만 자신들이 처한 시대 상황을 정반대 쪽에서 바라보았다. 강이천은 변화가 불가피한 기회의 시대로, 정조는 심각한 체제 위기의 시대로 여겼다. 부조리한 현실은 이상 사회를 꿈꾸게 만든다. 인터넷 모독죄를 빙자한 신공안정국의 전개를 안타까워하다 보니 강이천 사건이 저절로 떠올랐다.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서강대와 독일 튀빙겐대 교수를 지낸 백승종 교수의 ‘역설’은 역사 이야기며 역설(逆說)입니다. 나아가 세상을 바꾸자는 역설(易說)인 동시에, 역사평설을 역설(力說)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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