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24 19:57
수정 : 2008.10.2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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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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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역설
1792년(정조16) 나이 쉰 넘어 겨우 국록을 먹게 된 면천군수 박지원은 여러모로 피곤했다. 지역 내 천주교도를 단속하기도 힘겨웠지만 뜻밖의 흉년에 더욱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재해 상황을 상부에 사실대로 보고하게 했다. 그러자 아전들이 실정 모르는 그를 탓했다. “위에서 숫자를 삭감하면 큰일이니 부풀려 보고하십시다.” 그러나 박지원은 완강했다. “그건 거간꾼이나 하는 짓이다.”
조선 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피해 지역의 농민들에게 중앙정부가 세금을 감면해줬다. 재상(災傷)이 그것이다. 뜻이야 좋았지만 정작 농민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숙종 때 안동에서는 면세 혜택을 받지 못해 억울해하던 농부의 아내가 목을 맸다. 시어머니와 함께 4부자의 군포를 짜서 바쳤는데, 시모마저 세상을 뜨자 그 부담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죽음으로 항의한 것이다.
양반들은 멀쩡한 자기 땅이 흉년들었다며 감세 혜택을 가로챘다. 한 번 그 혜택을 누리면 두고두고 면세지로 인정되는 악습이 있어 재상 처분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아전과 목사, 감사 등 지방관들은 중앙에서 감면해준 세금으로 자기네 배를 불리기에 바빴다. 영조 때 창성부사 이철징은 그런 짓을 하다 조사를 받게 되자 아전들과 짜고 감사관을 살해하려고까지 했다.
신청한 대로 다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재상의 관례라 박지원의 고을에서처럼 허위 보고를 하자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런 판국이라 박지원의 아들이 그때 그 일을 슬며시 자랑한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세금 도둑질은 개인의 정직만으로는 풀지 못할 망국병이었다. 워낙 문제가 복잡해 정약용도 ‘이 문제의 처음과 끝이 어딘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 요즘의 쌀 직불금 소동도 그렇다. 해마다 돌아오는 자그마한 소득보전도 불로소득인데다 거액의 양도세 감면까지 보장되고 보니 온갖 도둑이 끼어들었다. 자고로 이 나라의 농민은 봉이란 말인가.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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