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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14 19:25 수정 : 2008.11.14 19:25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의역설

혜원 신윤복이 화제다. 그러나 그 시절 가장 인기 있는 화가는 단원 김홍도였다. 익살스럽고 사실적인 그의 화풍은 참신했다. 그림을 얻으려 몰려든 사람들로 그의 집 앞은 늘 북적댔다. 선왕 영조 이상으로 정조 역시 그의 재주를 아꼈다.

정조는 개방적인 면도 있었지만, 문체반정에서 보듯 새로운 문화와 혁신적 사고를 근본에서부터 봉쇄했다. 화단에서 정조의 우익을 담당한 이가 단원이었다. 그는 왕실기록화를 도맡았고, 국가적 편찬사업에도 화보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친체제 화가였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단원을 국민화가로 대접받게 만든 풍속화에서도 체제선전용 화보 냄새가 난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조선 사람들은 모두 유쾌하며, 유난히 살집도 좋다. 마치 근대국가의 선전용 포스터에서처럼 다들 행복한 표정이다. 이것은 단원과 정조의 정치적 밀월관계를 암시한다. 요컨대 단원의 그림은 사회적 실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백성들의 아픔을 감추고 정조가 다스리던 조선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묘사한 것이다.

단원은 여러모로 탁월한 화가였다. 하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성리학적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정조는 이런 단원을 아껴 현감이라는 알짜배기 자리까지 맡겼다. 단원에 대한 당대 인사들의 찬사도 당연히 최상급이었다. 역사 기록에서 혜원의 이름 석 자조차 발견하기 어려운 사실과는 정말 천양지차가 있다.

혜원은 속된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가 묘사한 18세기는 이미 자유연애의 시대다. 그는 도덕의 이름으로 금지된 욕망의 고삐를 풀어헤쳤다. 혜원은 시대를 앞서 산 것이다. 단원이 주류적 사고를 대변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지금 드라마와 영화에서 혜원이 단원보다 사랑받는 것은 남장 여자라는 극적 허구성 때문만이 아니다. 당대 지배층은 외면했지만 역사는 결코 혜원을 잊지 않았다.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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