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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21 19:20 수정 : 2008.11.21 19:20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의역설

때로 나는 역사란 과거의 그물에 잡힌 물고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읽을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든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 인간 사회의 성격을 꿰뚫어 보았다. 가령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가 그렇다. 소르본느 대학 졸업장이 대단하다 해도 시골 농부의 아들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 그 졸업장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파리의 중산층 자녀들이다. 그들은 부모에게서 사회적 자본을 물려받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설명은 우리 역사에도 적용된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들이 그러했다. 시험 때마다 늘 잠재적인 수험인구는 50만∼70만명이나 되었다. 500년 내내 이런 시험의 굴레가 세상을 지배했다. 당시로서는 그나마 그 시험이 또 선진적인 제도였다. “능력본위”로 인재를 뽑았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1만4620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해마다 30명 가량 합격의 영예를 안은 셈이다. 다들 20년∼30년씩 과거 공부에 매달렸다.

소싯적 연암 박지원은 과거 시험을 보이콧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도 아들에게는 ‘과거시험에 맞춰 문체를 바꿔라’ ‘답안지 빨리 쓰는 연습 좀 해라’며 채찍질했다. 아버지의 이런 닦달에도 아들은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선비가 문과에 급제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나 노른자위 벼슬은 대갓집 자제의 독점물이었다. 한미한 시골 양반은 홍패(합격증)를 끌어안고 벼슬을 기다리다 죽었다. 특히 18∼19세기에는 수도권 다음으로 평안도 출신 문과 합격자가 많았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도 요직에 나가지 못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한낱 속담일 뿐 현실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사회 부조리에 항거했어야 할 사람들이 용이 될 줄로 착각해 체제에 순응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요즘은 취업문마저 바늘구멍이다. 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무기쯤은 나오는 개천이라야 한다.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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